이달의 유물
2025년 9월 : 작호도(鵲虎圖) - 세계를 매료시킨 까치호랑이
세계를 매료시킨 까치호랑이- 작호도(鵲虎圖) 요즘 케이팝을 소재한 한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의 열풍이 뜨겁다. 케데헌의 OST인 ‘골든’이 미국 빌보드 차트 ‘핫 100’에 2주째 1위에 올랐다고 한다. 우리 자신도 믿기 어려운 일들이 현실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데몬헌터스의 인기가 치솟으면서 작품 속에서 사자 보이즈의 정령으로 등장하는 호랑이와 까치의 인기도 덩달아 올라 호랑이와 까치 굿즈을 사려는 사람들로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오픈런이 생기고 굿즈 품절사태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케데헌에서 등장하는 호랑이와 까치는 우리의 전통 민화(民畵)인 작호도(鵲虎圖)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캐릭터이다. 흔히 ‘작호도’ 혹은 ‘호작도’라고 불리는 까치호랑이 그림은 우리의 대표적인 민화이다. 민화는 이름 없는 떠돌이 화가들이 그린 그림으로 선비들이 엄숙하게 자신들의 이상향을 그림 속에 녹여냈던 것과 달리 백성들의 재치와 해학, 익살스러움이 담겨 있다. 박물관에는 조선시대 ‘작호도’부터 현대적인 감각으로 그린 현대 ‘까치호랑이’ 그림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작호도, 조선 후기(19세기), 51.3×108cm 작호도, 조선 후기(19세기), 57×105cm 작호도에서는 까치와 호랑이가 서로 짝을 이루며 등장한다. 까치는 소나무 위에서 호랑이 향해 지저귀고 있고 호랑이는 앞다리를 세우고 앉아 까치를 보거나 앞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까치는 예로부터 길조(吉鳥)로 여겨 ‘반가운 손님’과 ‘기쁜 소식’을 알리는 상징이었다. 호랑이는 우리 민족이 친근하게 여겨 온 동물로 잡귀를 물리치는 신령스러운 수호신이자 무섭고 위엄있는 존재이다. ‘호축삼재(虎逐三災)’라고 하여 호랑이는 화재(火災), 수재(水災), 풍재(風災) 등 재앙을 막아준다고 믿었다. 새해가 되면 용 그림과 함께 호랑이 그림을 벽에 붙여서 사악한 악귀를 물리치고자 했다. 호랑이와 까치가 주인공인 ‘작호도’에는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즐거운 소식만 가득하길 바라는 소망이 담겨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작호도에 보이는 호랑이는 백수(百獸)의 우두머리로 용맹스럽고 위엄이 있기보다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한 어수룩한 모습이다. 작호도, 조선(19세기), 65.7×48cm 위의 그림에서 호랑이가 곰방대를 물고 있는 모습은 “아주 옛날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란 말을 떠올리게 한다. 호랑이를 의인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호랑이는 큰 눈을 게슴츠레 뜨고 바보스러운 표정과 어눌한 몸짓을 하고 있다. 호랑이의 상징인 날카로운 발톱은 숨겨져 보이지 않는다. 주위에는 구름에 반쯤 가린 해와 고귀함과 장수를 상징하는 학과 거북이가 배치되어 있다. 사물들의 인과관계와 원근법은 무시되고 있지만 오히려 자유로운 표현이 친근감을 준다. 작호도에 보이는 호랑이는 일반적으로 양반이나 권력자, 부패한 탐관오리를 상징하며 까치는 백성 즉 민초(民草)들을 상징한다. 호랑이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백성을 억압하는 양반관료나 탐관오리를 풍자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무서운 권력자도 사실은 웃음거리일 수 있다는 풍자, 그리고 일상에서의 두려움을 재치있게 풀어낸 것이다. 까치호랑이, 이영수 作, 위의 ‘까치호랑이’는 우리 대학 동양화과에 재직하셨던 이영수 명예교수의 작품이다. 교내에 산재해 있던 미술품들이 2024년에 박물관으로 이관되면서 박물관에서 소장하게 되었다. 이영수 화백은 민화를 수집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한 ‘한국민화전집’ 시리즈를 발간할 정도로 민화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가진 분이다. 평생 우리 민화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널리 알리고 대중화하는 작업을 하셨다. 이영수 화백의 ‘까치호랑이’는 오방색과 오간색을 사용한 강렬한 색감과 단순화된 선으로 까치와 호랑이를 더욱 세련된 현대적인 감각으로 구현하였다. 작호도는 단순히 재미있는 동물 그림을 넘어서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유머, 그리고 삶의 바람을 담아낸 한국 민화이다. 까치가 전해주는 기쁜 소식과 호랑이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통해, 옛사람들이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하고 웃음을 만들어냈는지를 느껴볼 수 있다. 전통 민화 속의 호랑이와 까치가 오늘날 매력있고 개성 넘치는 캐릭터로 재탄생하면서 까치와 호랑이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새로운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케데헌의 까치호랑이 열풍을 보며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는다. <참고자료> 이영수 화백, "산수(傘壽) 앞둔 산수(山水)"와 "민화 대가“ https://www.kchannel.kr/news/articleView.html?idxno=62895 허균, 옛그림을 보는 법, 돌베개, 2013.
2025.09.02 0 67
2025년 8월 : 진주선
궁중의 섬세한 아름다움 – 진주선(眞珠扇) 진주선(眞珠扇)은 조선 시대 왕실 여성의 혼례 의식에 사용되었던 의례용 둥근 부채(團扇)입니다. 일상적인 부채와는 달리 진주선은 왕비, 세자빈, 공주 등의 궁중 여성의 혼례 시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 사용했으며, 그 화려하고 정교한 외형은 왕실의 위엄과 품격을 상징합니다. 진주선(眞珠扇), 조선 후기(19세기), 28.5×47cm 진주선 뒷면 진주선 상·하단의 장식 우리 박물관 소장품인 이 진주선은 붉은색 비단에 모란무늬를 좌우 대칭으로 수놓아 부채 면 전체를 화려하게 장식하였습니다. 부채의 가장자리에는 동(銅)테가 둘러져 있으며, 중심에는 꽃무늬(花紋)를 음각한 동판이 부착되어 있습니다. 부채의 상·하단에는 꽃 모양의 동판이 부착되어 있는데, 상단에는 ‘男(남)’, 하단에는 ‘子(자)’ 글자가 음각되어 있어 다산을 기원하는 길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장식 동판에는 붉은색과 푸른색 원석이 감장(嵌裝) 기법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현종실록』(1662년) 기사에 따르면 국혼에 진주선을 사용할 당시, 그 제작 비용이 백금 1,000냥에 달해 백성들이 고통을 겪는 와중에 지나치게 사치스럽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선조로부터 내려온 관습이므로 폐지할 수 없다”고 하여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후 궁중의 진주선을 본뜬 혼례선(婚扇)이 반가 및 민간에서도 사용되었으며, 이는 나무나 놋쇠 틀에 붉은 비단과 모란 수를 놓은 간소화된 형태였습니다. 우리 박물관에는 이러한 혼선으로 추정되는 부채도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 부채는 진주선과 유사하지만 재질과 문양 등에서 간소화된 혼례선으로 부채의 테두리는 나무로 제작되었으며 붉은 색의 선면에는 소소한 꽃무늬가 수놓아져 있습니다. 손잡이 끝에는 환고리가 달리고 딸기술 매듭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혼례선(婚扇), 조선 후기(18세기), 27×48cm 장식술길이 33cm 현존하는 진주선은 매우 희소하며, 국립고궁박물관 등의 몇몇 기관에 일부 소장되어 있습니다. 유물의 상태에 따라 진주가 퇴색하거나 탈락된 경우도 있지만, 원형이 유지된 진주선은 전통 복식과 공예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우리 박물관 소장 진주선은 조선 왕실의 예술성과 여성 문화를 섬세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로, 오늘날 장신구 디자인과 전통 공예 복원 분야에도 깊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장인의 정교한 기술, 궁중 여성의 품위, 그리고 한국인의 전통 미의식이 담긴 이 유물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아름다움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25.08.05 0 175
2025년 7월 : 봉화무늬 막새기
봉황이 날다 ~ 태평성세의 꿈 ! - 봉황무늬 막새기와 - 봉황은 새 중의 으뜸으로 상서롭고 고귀한 뜻을 지닌 상상의 새이다. 수컷을 봉(鳳), 암컷을 황(凰)이라고 하는데, 그 생김새는 문헌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설문해자 앞부분은 기러기, 뒤는 기린, 뱀의 목, 물고기의 꼬리, 황새의 이마, 원앙새의 깃, 용의 무늬, 호랑이의 등, 제비의 턱, 닭의 부리 주서 닭과 비슷한 형체, 뱀의 머리에 물고기의 꼬리 경주 인용사지 출토 봉황무늬 암막새기와 부분 봉황은 기린, 거북, 용과 함께 사령(4靈)의 하나로 동방 군자의 나라에서 나와서 사해(四海) 밖을 날아 곤륜산(崑崙山)을 지나 지주(砥柱)의 물을 마시고 약수(弱手)에 깃을 씻고 저녁에 풍혈(風穴)에서 자는데, 이 새는 항상 도(道)가 있는 나라에 출현하며, 이 새가 나타나면 천하가 크게 안녕한다 하여 성천자(聖天子)의 상징으로 성군(聖君)의 덕치(德治)를 증명하는 새로 인식되었다. 봉황무늬가 새겨진 경복궁 답도 이러한 이유에서 봉궐(鳳闕), 봉연(鳳輦), 봉여(鳳輿), 봉잠(鳳簪) 등 왕과 관련된 용어들에 많이 사용되었다. 또 고려시대 이후 조선시대의 궁중 가무에 봉황과 관련된 「오양선(五羊仙)」, 「만년환(萬年歡)」, 「봉황음(鳳凰吟)」, 「봉래의(鳳來儀)」 등을 통해 고귀함과 상서(祥瑞)의 상징을 지닌 봉황의 출현으로 증명되는 태평성세를 이룩한 군왕의 성덕을 칭송하는 의미를 부여했음을 알 수 있다. 서울 경희궁지 숭정전 앞 답도에 새겨진 봉황무늬 (탁본, C570, 125.4×89.5cm) 이에 봉황의 이미지는 건축과 공예 등에서 널리 사용되었으며, 조선시대 창덕궁 인정전과 경복궁 근정전 천장에 그려지기도 하였으며, 경희궁의 숭정전 등 일부 궁궐의 정전 앞 답도에는 석조각으로 봉황을 새기기도 하였고, 궁궐 지붕을 장식하는 막새기와의 주요 문양으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봉황과 관련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고구려 고분벽화나 충남 부여에서 출토된 백제의 금동대향로나 문양전 등을 통해 삼국시대부터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경주 등에서 봉황무늬 막새기와가 출토되었으며, 고려 개성의 만월대를 비롯한 사찰터, 조선 궁궐 등에서도 많은 봉황무늬 막새기와가 출토되었다. 석주선기념박물관은 경주지역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의 유물과 개성 만월대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고려시대의 막새, 서울에서 출토된 조선시대 막새 등을 수장하고 있다. 봉황무늬 암막새기와(A730, 너비 30.5cm, 경북 경주 인용사지 출토) 경주 인용사지에서 출토된 봉황무늬 막새기와는 막새면과 막새 하단에 보상화무늬가 더해진 인동당초무늬를 가득 채워 상서로운 배경을 만들고, 막새면 좌우에 1쌍의 봉황을 마주보게 새겼는데, 날카로운 부리와 미아의 뿔 장식, 긴 목과 유려한 몸체, 긴 다리와 긴 꼬리를 갖춘 모습으로 날개를 크게 펴서 비상하는 이상(理想)적인 표현이 주목된다. 기러기의 머리와 같이 표현된 봉황무늬 수막새기와 (A657, 지름 14.5cm, 통일신라, 경주 출토) 기러기의 머리와 같이 표현된 봉황무늬 암막새기와 (A7932, 13.7×8.6cm, 통일신라, 경북 영천 출토) 이처럼 막새기와에 장식된 봉황은 주로 당초무늬와 구름무늬, 보상화무늬, 인동무늬, 연꽃무늬 등이 배치된 상서로운 공간에 서로 마주보고 하늘을 날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경주 동천동과 영천에서 출토된 막새의 경우 기러기와 같은 머리에 날개를 활짝 핀 측면의 모습이며, 개성 만월대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하는 봉황무늬 수막새는 닭과 같은 머리에 날개를 접고 걷는 듯한 모습이다. 정면상으로 표현한 봉황무늬 수막새기와 (A1039, 10.7×13.7cm, 통일신라, 경주 출토) 고려시대의 봉황무늬 수막새기와 (A15308, 지름 14.8cm, 고려, 전 개성 출토) 봉황의 각 신체 부위는 인(仁)・의(義)・예(禮)・덕(德)・신(信)을 나타낸다고 하여 봉황이 등장하는 것은 이러한 요소가 두루 갖추어진 시대, 즉 태평성세(太平聖歲)로 인식하게 되었다. 한편, 봉황이 먹는다는 열매(竹實)와 연결되어 대나무가 절개와 기상을 의미하게 되었는데, 이에 봉황은 절개와 기상을 갖춘 뛰어나고 청렴한 선비에 비유하기도 하며, 기러기나 원앙처럼 화목한 짝을 상징하기도 한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기와·전, 1998.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탑영 명선 하, 2009.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개개이와 고려와전, 2012.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용인 서봉사지, 천년의 베일을 벗다, 2019.
2025.07.01 0 167
2025년 6월 : 궁중여인의 여름용 당의唐衣 H
더위가 시작되는 6월입니다. 석주선기념박물관 ‘이달의 유물’에서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여인들이 여름이 되면 착용하는 당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당의는 조선시대 여성 소례복의 대표적인 옷으로 궁중과 사대부가 여성들의 위계와 품격, 그리고 예법을 상징하는 복식입니다. 저고리 위에 덧입는 옷으로, 기본 구조는 저고리와 유사하나, 세 자락이 길고 양옆의 곡선과 트임이 있는 것이 특징이며, 격식을 갖춘 외출복 또는 예복으로 착용되었습니다. 궁중에서는 예식이나 문안 인사 시, 명절의 예복으로 민간에서는 궁에 입궐할 때나 혼례복 등으로 착용하였고, 신분에 따라 장식 등에서 차이를 두었습니다. 덕온공주의 금박 당의 1837년 덕온공주 혼례 시 항아(궁녀)당의 1837년 순정효황후와 궁녀들의 모습(당의 장식의 차이를 확인해 볼 수 있다.) 당의의 유래에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현재까지 가장 설득력 있는 기원은 조선 전기 장저고리의 형태에서 점차 변화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150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의 여성의 긴 저고리와 당의의 유물들을 연대별로 변화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옆트임 구조와 좌임으로 여미는 방식에서 당의와 동일한 구조를 보이며, 크기와 품만 다를 뿐 기본 형식은 동일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직금당저고리 1500년대 광해군비 당의 1600년대 당의 1700년대 당의 1900년대 조선시대 문헌에 기록된 당의의 명칭은 ‘저고리’, ‘당저고리’, ‘당고의’, ‘당의복’, ‘당한삼’, ‘당의’ 등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왕비, 세자빈은 ‘당고의’, 군부인, 옹주는 ‘당저고리’ 등 이처럼 같은 옷이라도 신분에 따라 불리는 명칭이 달랐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의의 기본 색상은 겉감은 녹색, 안감은 홍색을 사용하였으며, 한 겹으로 만들 때는 녹색계열의 옷감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외 동지 명절에는 팥죽색의 자주색으로 당의를 만들어 입기도 하였습니다. 겹당의(1800년대) 홑당의(1900년대) 동지날 착용한 자적당의 (1836년) 곧 다가오는 여름철, 조선시대의 여인들은 어떤 당의를 착용하고 더위를 이겨냈을까요? 조선시대 궁중 비빈(妃嬪)들의 사계절 의복을 기록해 둔 『사절복색자장요람』에서 보면, 여름을 앞둔 4월에 진상된 의복이거나 여름철인 5~8월에 착용되는 의복으로 바람이 잘 통하는 얇은 옷감(사직물, 광사)로 만든 당한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월 단오 초록광사 깍근 당한삼․ 사웃치마․ 옥치환…… 오월 초십일 백광사 당한삼…" (『사절복색자장요람』 中) 『사절복색자장요람』, 숙명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특히 더운 여름을 맞기 전의 계절, 일년 중에서 가장 양기가 왕성한 날인 한국의 명절 단오(端午)에 “깍은 당한삼”이라고 불리는 당의를 착용해주는데, '깍은 당한삼'과 일반당의와의 차이점은 아랫면의 뾰족한 양쪽 모서리가 바깥으로 뻗어진 곡선형이 아닌 두 귀가 안쪽으로 말아 들어가 둥글게 모양을 내는 형태로 일반당의와 다른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깍은”이라는 용어는 ‘솔기(또는 시접)가 깎은 듯이 가늘다’라는 의미의 “깍기(또는 깎기)”로 얇게 말아준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명칭의 당의와 관련된 유물이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현재 진행하고 있는 박물관특별전 ‘당의랩소디“에서 선보이고 있습니다. 금박 당의, 1837년 깍은 당한삼, 1800년대 일반 당의의 아랫면, 1837년 깍은 당한삼의 아랫면, 1800년대
2025.06.03 0 544
2025년 5월 : 벼루(조희룡 소장연) H
벼루는 글씨를 쓰기 위한 문방도구로서 붓, 먹, 종이와 함께 문방사우(文房四友)라고 불리며 선비의 삶과 학문를 상징해 왔습니다. 벼루를 한자로는 ‘연(硯)’이라고 하는데 간다는 의미에서 ‘연(硏)’이라고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먹을 가는 바닥 부분인 연당(硯堂), 갈아 낸 먹물이 모이는 오목하게 파진 물집인 연지(硯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중국에서 전래되어 삼국시대부터 벼루를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삼국시대의 출토된 벼루들은 여러 개의 다리를 가진 둥근 모양의 원형 벼루들이 대부분입니다. 신라 벼루로는 우리 박물관이 경주 인왕동에서 수습한 도제(陶製) 벼루가 있습니다. 박물관이 경주 인왕동에서 수습한 신라 벼루는 원형에 동물 다리 형태의 다리가 4개 붙어 있어서 원형수족연(圓形獸足硏)이라고 합니다. 둥근 연당부분에 파손 흔적이 있지만 그 주위로 골을 파서 먹물이 모아지게 만들고 주위의 막음까지 있는 완전한 형태로 유약도 발라져 있어 신라 벼루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경주 인왕동 수습 신라벼루 풍류를 즐기는 우리 옛 조상들은 벼루를 단지 먹을 가는 도구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연당과 연지 둘레에 각종 아름다운 조각을 새겨 넣어 한껏 멋을 내고 감상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명연(名硯)으로 불리는 벼루에는 화조, 산수, 소나무 등이 조각되어 있어서 벼루의 품위를 한껏 높여 줍니다. 뒷면에는 명문장가와 명필이 모여 연명(硯銘)을 새겨 넣고 벼루 자체에 이름을 붙여 주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벼루에 새겨진 조각은 미술품으로서의 품격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였으며 아무리 석질이 좋다 하더라도 조각이 서투르면 벼루의 가치가 떨어진 것으로 여겼습니다. 조선시대 인물 중에 벼루에 각별한 애정을 가진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우봉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이 있습니다. 조희룡은 시, 글씨, 그림에 모두 뛰어났으며 매화 그림을 많이 그린 사람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문방사우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는데 특히 벼루에 대해서는 벽(癖)이 있다고 할 정도로 온갖 벼루를 사 모았던 ‘벼루 마니아’였습니다. 전국의 명석(名石)을 찾아다니며 벼루를 수집했던 조희룡은 벼루 102개가 모이자 자신의 집을 “백이연전전려(百二硯田田廬)”즉 ‘102개의 벼루 밭이 있는 시골집’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우리 박물관에는 약 700여 점의 벼루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우봉 조희룡이 생전에 소장했던 벼루도 있습니다. 조희룡 소장연은 짙은 자줏빛의 고산석(高山石)으로 만들어졌으며 모를 약간 둥글게 깎은 사각 모양으로 둥근 연당과 양 끝이 아래로 구부러진 타원형의 연지를 갖고 있습니다. 고산석은 조선 후기 문인이 선호했던 고급 벼루 재질로, 먹이 잘 갈리고 윤기 있는 표면과 깊이 있는 색조를 갖춘 것이 특징입니다. 조희룡 소장벼루 (앞면) 연당과 연지 주위로는 학, 매화, 산, 거북이, 사슴 등의 십장생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뒷면에는 행함과 실천을 강조한 “讀得一尺不如行得一寸(1척만큼 읽는 것이 1촌만큼 행하는 것만 못하다)”는 문장과 그의 호인 우봉(又峰)이라는 글자가 인장 형태로 새겨져 있어서 우봉 조희룡이 소장했던 벼루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조희룡 소장벼루 (뒷면) 벼루에 미쳤다고 할 정도로 벼루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진 조희룡의 벼루라는 점에서 남다른 풍류를 느끼게 합니다. 연당에는 먹을 갈아 생긴 패임이 있으며 가장자리의 닳은 부분, 표면의 마모 등 실제 사용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이 벼루는 조희룡이 실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은 유물로, 문인의 손때와 정신이 깃든 창작 도구의 가치를 지닙니다. 또한 각자(刻字)된 문구와 조형미를 통해 조선후기 문인 사회의 미의식과 실천 윤리를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벼루는 단순한 필기도구를 넘어, 선비들의 사유와 취향, 예술 세계를 구현한 복합적인 문화재입니다. 조희룡의 고산석 벼루는 그러한 상징성과 정신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조선 시대 벼루 제작기술과 그리고 문인들의 생활문화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2025.05.02 0 234605
2025년 04월 : 화관(花冠)
화관(花冠)은 꽃·보석 등을 장식하여 아름답게 만든 쓰개로, 조선시대 왕실 여인들이 예복과 함께 착용하던 의례용 관모 중 하나입니다. 혹은 궁중 잔치에서 정재여령(呈才女伶)이 춤을 출 때 착용했던 관모입니다. 화관은 ‘꽃 화(花)’와 ‘갓 관(冠)’이라는 이름처럼, 머리에 꽃을 꽂아 장식했던 삽화(揷花)의 풍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꽃으로 장식한 화관은 고대 중국과 동유럽에서도 유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점차 금방 시드는 생화를 대신해서 종이나 비단 등으로 만든 조화(造花)가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나라 화관의 기원에 대한 근거는 많지 않으나 송대(宋代)의 화관이나 삽화의 유행이 고려시대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화관(花冠) 조선시대 여성의 화관은 주로 경사나 혼례 시에 예복과 함께 착용되었습니다. 이는 조선 영·정조대에 가체 대용으로 족두리와 함께 화관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확산되었습니다. 『병와집甁窩集』에서 화관은 혼인한 여성[昏女]의 머리장식[頭飾]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조선 말기의 왕실(王室)에서는 주로 소례복인 당의(唐衣)에 착용하였고 민간에서는 혼례시 착용토록 허용되었습니다. 기본형태는 유사하나 장식품의 재질과 장식에 차이가 있습니다. 머리에는 화관을 쓰고 대란치마와 당의를 착용한 모습의 덕혜옹주 (출처 : 황족화보皇族畵報》 제220호, 국립고궁박물관) 화관은 꽃 모양으로 장식하거나 각종 보석을 올려서 화려하게 장식하여 만듭니다. 예복용 화관은 양옆이 개방된 구조로 대부분 여러 겹의 종이를 배접하여 만든 사각이나 육각, 혹은 팔각의 기본 틀을 검은색, 홍색 등의 비단으로 감싸고 그 위에 옥판, 석웅황, 밀화, 비취, 진주 등의 각종 보석을 올려 장식하였습니다. 특히 앞 중심에는 금전지로 싼 술 장식을 늘어뜨리거나 진주로 된 드림을 달아 장식하기도 합니다. 상판에는 옥, 석웅황, 유리구슬 등과 함께 떨철을 달아 움직임에 따라 아름답게 보일 수 있도록 장식했습니다. 평양 지방의 신부 혼례복에서는 색색의 조화를 꽂아서 장식한 화려한 모양의 화관을 사용하였습니다. 머리 위로 높게 솟은 구조와 좌우로 퍼진 형태는 권위와 존엄, 길상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장식 요소 하나하나에는 부귀·다산·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원삼과 화관을 착용한 신부 -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 전시 포스터 (출처:국립민속박물관) 이러한 예장용으로써의 화관 뿐 아니라 조선 말기까지 궁중정재(宮中呈才)할 때 여령(女伶)·동기(童妓)·무동(舞童)의 머리 장식품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세종실록世宗實錄』에서 남악(男樂) 정재(呈才) 관복 중에 부용관(芙蓉冠)의 기록이 있고, 『악학궤범樂學軌範』 무동관복도설에도 부용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부용관의 ‘부용(芙蓉)’은 연꽃을 의미하는 한자로 따라서 부용관은 화관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려한 장식의 예복용 화관과 달리 궁중정재에서 동기(童伎)용 화관은 비슷한 구조를 가지나 화려한 보석 장식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부용관(본 박물관 소장품) 오늘날 화관은 한국 전통의상 속의 미적 절정을 보여주는 유물로, 그 속에 담긴 기술, 상징, 예법은 한국 전통문화의 깊이를 말해줍니다. 고운 꽃이 머리에 피어난 듯한 화관은, 단순한 장신구를 넘어 여성의 품위와 경사스러운 순간을 기리는 문화적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왕실의 예복과 장신구』, 국립고궁박물관, 2015 『한국의식주생활사전(의생활)』, 국립민속박물관, 2017 국악사전, 국립국악원, https://www.gugak.go.kr/ency/topic/view/552
2025.04.02 0 489
2023년 12월 : 경주 대릉원, 인왕동 156-1・2호분 출토 신라유물 H
● 단국대학교 박물관 고적조사단, 신라 고분(古墳) 정화사업 참여 경주 인왕동 156-1・2호분은 1971년부터 진행된 ‘경주종합개발계획사업’의 일환으로 “신라 고분 정화사업”이 진행되면서 단국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습니다. 고분 발굴조사는 1973년 7월 15일부터 8월 17일까지 정영호 교수(당시 박물관장)를 단장으로 이호영 교수(당시 박물관 연구원)와 박영복 전 국립경주박물관장(당시 대학원생)을 비롯한 사학과 학생 34명이 참여하였습니다. 장충식 명예이사장님(당시 단국대학교 총장, 사진 중앙)은 조사현장을 찾아 삼복더위에 조사에 참여한 발굴조사단을 격려하였습니다(1973년). 단국대학교 조사단은 경주 미추왕릉 북쪽의 황남동 109호분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하였으나, 1934년 조선고적연구회에 의해 조사된 유적으로 확인되어, 인왕동의 추정 고분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고분 발굴조사 모습 ● 새로운 신라 왕릉급 고분을 발견하다. ○ 인왕동 156-1호분 7월 15일 시작된 156-1호분 발굴조사는 봉분을 이루는 적석(積石)을 제거하는 일에만 15일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러나 7월 3 일 조사단의 기대와는 다르게 남벽에서 도굴(盜掘) 흔적이 확인되었습니다. 고분은 적석목곽묘의 형태로 은제 과대(銙帶)를 비롯하여 토기편과 유리구슬 등 22건 230점의 유물이 수습되었습니다. 인왕동 156-1호분 출토 은제 과대 ○ 156-2호분 2호분은 156-1호분을 발굴하던 중 북쪽 지하 30cm에서 적석의 일부가 노출되어 조사확인된 적석총입니다. 7월 20일부터 8월 17일까지 진행된 발굴조사를 통해서 묘는 적석목곽묘임이 확인되었습니다. 부장품으로 굵은고리 금귀걸이 1쌍, 목걸이, 은제 과대, 둥근고리 큰칼(환두대도)편, 토기 등 167건 781점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고분은 출토유물의 편년으로 보아 5세기 후반에 조성된 신라 최상위 계층의 무덤으로 밝혀졌습니다. 인왕동 156-2호분 출토 여러잔토기(母子高杯) 인왕동 156-2호분 출토 철기류 인왕동 156-2호분 출토 토기류 ● 인왕동 156-1・2호분 발굴 50주년, 다시 태어나다. 2023년은 경주 인왕동 156-1・2호분이 세상에 알려진 지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당시 발굴조사에 참여하였던 단국인들의 노력과 땀이 문화재청과 (사)대학박물관협회가 주관하는 ‘매장문화재 미정리유물 보존 및 활용사업’의 일환으로 발굴 50년 만에 다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인왕동 156-2호분 출토 장신구(금귀걸이, 곡옥, 목걸이 등)
2023.11.30 0 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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