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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유물 2023년 9월 : 결화온혜(結花溫鞋)와 피초혜(皮草鞋)

2023.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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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판 찜통더위와 가을은 맞이하는 시원한 비가 번갈아 찾아오는 9월입니다. 이달의 유물에서는 조선시대 멋쟁이 여인들이 신었던 플랫슈즈와 샌들인 전통신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전통신 중 신목(발등부터 발목까지)없는 신발을 혜(鞋)라고 부릅니다. 가죽, 고급 비단 등을 사용하여 만들며, 신발의 재료와 장식에 따라서 흑피혜(黑皮鞋) · 녹피혜(鹿皮鞋) · 투혜(套鞋) · 삽혜(靸鞋) · 운혜(雲鞋) · 온혜(溫鞋) · 당혜(唐鞋) · 태사혜(太史鞋) · 흑혜(黑鞋), 초혜(草鞋) 등으로 분류가 됩니다. 이런 고급재료를 사용한 신발[혜]들은 남녀노소 양반을 비롯한 상류층에서 일상적으로 신었으며, 서민들은 혼례 때에 신을 수 있었습니다. 흑혜(黑鞋), 1800년대 운혜(雲鞋), 1900년대 태사혜(太史鞋), 1900년대 당혜(唐鞋), 1900년대 여러 디자인의 신발[혜] 중에서 현대 스타일에 견주어도 될 만한 신발이 있습니다. 2004년 대전광역시 이사동에서 출토된 신발 두 점으로, 안악군수(安岳郡守)를 지낸 송세훈(宋世勛:1479~1552)의 부인인 강릉김씨(江陵金氏:1520년 사망 추정)의 관 속 발아래에 놓여 있던 가죽 신입니다. 이 신발들은 가죽과 고급직물을 사용하여 만든 것으로 앞코를 화려하게 장식하였습니다. 현대에 유행하는 플랫슈즈와 샌들과 같은 스타일의 신발을 우리조상들은 이미 500여 년 전부터 착용하고 있었습니다. 결화온혜(結花溫鞋), 1520년대 피초혜(皮草鞋), 1520년대 플랫슈즈 또는 고무신과 유사한 형태의 이 신발은 신코 부분에 매화(梅花)를 장식하였는데, 꽃 안쪽에 금전지가 조금 남아있습니다. 겉감은 진한 청색의 비단, 안쪽과 바닥은 가죽으로 만들고, 매화장식은 왼쪽으로 꼬아준 비단실[絹絲]로 엮었습니다. 이 신코에 꽃을 맺어 장식한 신을 조선 후기 왕실에서는 ‘결화온혜(結花溫鞋)’라 불렀으며, 중궁전과 빈궁의 탄일과 정조(正朝, 설날), 중삼(삼짓날), 추석 같은 절일(節日)에 ‘흑웅피결화온혜(黑熊皮結花溫鞋)’, ‘흑당피결화온혜(黑唐皮結花溫鞋)’를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결화온혜 신코 장식 부분 복원도(by 황진영) 현대의 샌들과도 같고 짚신처럼 뒤가 트여있는 이 신발은 짚신과 비교했을 때 구조는 거의 동일지만 가죽으로 만든 신발로 ‘피초혜(皮草鞋)’라고 합니다. 겉은 연화문단으로 감싸주고 끈과 안감, 밑바닥을 가죽으로 만들었습니다. 신코 중앙에는 홍색 겹 가죽 사이에 금전지를 넣어 만든 제비부리 모양으로 장식하였고, 그 옆(엄지총)으로 2줄의 가죽선 사이에 금선단 옷감을 한 줄 끼워 화려하게 장식해 주었습니다. 피초혜 신코 장식 부분 옆선(가죽끈) 장식 부분 복원품(by 한광순) 문헌기록을 살펴보면, 조선 초기에는 남녀의 피초혜 착용을 금지했을 정도로 피초혜가 대중적으로 착용되었으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주로 왕실 여성들이 삼짓날이나 단오와 같이 따듯한 날에 백당피초혜(白唐皮草鞋)를 신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계급에 따라 의복 제도가 모두 등급이 있어서 뚜렷한 형식이 갖추어졌는데, 다만 신발에 대한 제도가 아직껏 상세히 제정되지 아니하여, ······· 남녀간에 피초혜(皮草鞋)를 모두 금지하게 하소서” -『조선왕조실록』 세종 8년(1426) 1월 26일, 12년(1430) 5월 15일 기록- 특히 결화온혜는 대비전(大妃殿)에는 진상하지 않았으며, 『육전조례(六典條例)』(1867) 「공전」 상의원 조에도 ‘자전(신정왕후)의 온혜에는 결화가 없다[溫鞋結花無]’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꽃장식은 남편이 있는 부인만이 신을 수 있는 특별한 장식으로 추정되는 신발입니다. 결화온혜가 왕실 여성의 기록에만 있는 것으로 볼 때 최상류층 신분을 짐작할 수 있으며, 디테일한 부분까지 아름답게 표현한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의 강릉김씨 묘 출토 결화온혜와 피초혜는 조선시대 가장 오래된 신발로 중요한 가치를 지닌 유물입니다.

이달의 유물 2023년 8월 : 금동 용두(金銅龍頭)

2023.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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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진전사지(陣田寺址)에서 수습된 금동 용두입니다. 부릅뜬 눈과 굵은 눈썹, 이마 가운데 힘있게 뻗은 외뿔이 묘사되었는데, 뿔은 끝이 세 갈래로 갈라졌습니다. 입 주위에는 끝이 말린 곡선의 수염이 표현되었고, 수염 양쪽에는 구멍이 있습니다. 내부는 비어있으며, 입 가운데 부분에는 구멍 뚫린 쇠고리가 부착되어있습니다. 용은 동서양에서 상상되어온 동물로서 관련한 많은 신화와 전설이 남아있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인충(鱗蟲)의 우두머리로서 머리는 낙타와 비슷하고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목덜미는 뱀, 배는 큰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와 비슷하다고 묘사되어 있습니다.( 『광아(廣雅)』 「익조(翼鳥)」) 이와 같이 각 동물의 특징을 모두 갖춘 용은 무궁무진한 능력을 가진 동물로 신앙되었기 때문에 황제나 왕을 상징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용은 물과 깊은 관계가 있는 수신(水神)으로서 목조건물을 화마(火魔)로부터 지켜내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고, 풍수(風水), 설화, 종교 등 삶의 전반적인 영역에 걸쳐 중요한 모티프가 되었으며, 다양한 소재를 활용하여 수 많은 작품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상주 남장사 보광전 벽화 삼국시대 불교의 전래 이후에는 불가(佛家)에서 불법승(佛法僧)의 3보(寶)를 수호하는 역할 뿐만아니라 나라를 지키는 호국룡(護國龍)으로서 많은 설화와 다양한 작품으로 표현되었습니다. 경주 경덕왕릉 호석에 새겨진 용, 경주 김유신묘 호석에 새겨진 용(탁본) 용은 12지의 일원으로서 무덤을 지키는 호석(護石) 뿐만 아니라 석탑 등에도 새겨졌습니다. 평창 상원사 동종의 용뉴(龍鈕) 불교 사물(四物) 가운데 하나인 범종(梵鍾)은 그 울림으로 명부의 모든 무리를 불법(佛法)의 수호 아래 놓이게 하는데, 종의 상단에 용이 배치되는 것은 그 소리가 구리로 만든 쟁반(銅盤)을 울리는 소리와 같다는 특징이 반영된 것입니다. 양산 통도사 극락보전의 반야용선 반야용선(般若龍船)은 고해를 건너 피안을 향하는 구원의 배입니다. 즉, 깨달음의 세계인 정토로 건너가기 위해 필요한 배는 불법을 수호하는 용이 이끈다고 여겨졌습니다. 정토의 인도자인 인로왕보살이 선두에서 이끌고 지장보살이 배 끝을 지키는데, 용이 배를 등에 업고 거센 파도를 헤쳐나가는 모습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청동용두형 간두(국립청주박물관소장), 금동용두형 당간 수식(국립경주박물관, 보물), 복원된 당간의 용두형 수식(국립대구박물관) 용두는 사찰의 영역을 표시하는 당간의 머리장식으로 활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대형으로 제작된 경우도 있으나, 석주선기념박물관의 금동용두나 국립청주박물관 소장 청동용두 한쌍에서처럼 소형으로 제작된 것들이 있는데, 입에 문 여의주 끝에 고리를 돌출시킨 형태로 당간과 유사한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추정됩니다.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금동용두는 벌린 입에 고리를 물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불교적 용구를 매달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사찰에서 의식을 진행할 때 당(幢)이나 번(幡)을 매달았던 기물(器物)의 부속품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양양 진전사지(陳田寺址) 양양 진전사지 삼층석탑 진전사는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었으며, 도의선사(道意禪師)가 머물며 선법(禪法)을 널리 펼쳐 염거화상(廉居和尙, ?~844)과 보조선사(普照禪師) 체징(體澄, 804~880)으로 이어지는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중심이 되는데, 오늘날 대한불교 조계종의 시원 사찰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석주선기념박물관은 진전사지 삼층석탑(국보)과 도의선사탑(보물)을 발견조사 하였으며, 1974년부터 1979년까지 6차례에 걸쳐 발굴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진전사지 도의선사탑, 흥법사지 염거화상탑,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 【참고문헌】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2009, 『박물관 신축 개관 전시 도록』. 『광아(廣雅)』 「익조(翼鳥)」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현대불교, 「반야용선」 *청동용두형 간두”는 e뮤지엄에서 제공하는 공공누리 제1유형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을 이용하였음.

이달의 유물 2023년 7월 : 등배자(藤背子)와 등토수(藤吐手)

2023.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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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배자藤背子와 등토수藤吐手 본격적으로 무더위가 시작되는 7월, 우리 선조들은 이 무더위를 어떻게 이겨냈을까요? 음력 5월 5일 단오에는 여름이 시작되기 전 무더운 여름을 잘 보내라는 의미로 단오부채를 선물로 주고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가장 대표적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은 대나무를 엮어 원통형으로 만들어 끌어안고 잠을 청하는 전통 침구인 죽부인이 있습니다. 죽부인, 1820년 박물관 단오부채 만들기 행사(2023년 5월) 죽부인과 부채 같은 대표적인 여름용 소품 외에 직접 착용하는 옷으로는 모시나 삼베 그리고 사직물처럼 통기성이 좋은 직물로 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여름철 직물로 만든 옷들도 땀이 나면 몸에 달라붙기 때문에 더 시원하고 통기성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아이디어가 필요했습니다. 『임원경제지』 표지와 섬용지 목차부분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조선후기의 실학자 서유구徐有榘(1764-1845)가 펴낸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권48∼51, 섬용지贍用志의 기록에는 여름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특별한 옷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등줄기를 엮어서 배자형으로 만들어 여름에 피부에 직접 닿게 입어 옷에 땀이 스며드는 것을 막아준다. 고가의 재료인 말총이나 털을 넣어서 만든 것은 진귀한 것이고, 서민들은 대나무나 담쟁이 풀, 모시 풀로 만든 것을 사용한다.” 등배자 앞면과 앞·뒤 펼친 모습, 1900년대 초 이 책에서 소개하는 옷이 바로 석주선기념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등배자입니다. 배자(조끼)형태로 앞·뒤를 펼치면 한 장이 되는데, 옆구리 아래쪽을 끈으로 앞·뒤를 연결하여 조끼처럼 입도록 하였습니다. 등나무의 줄기 또는 대나무를 얇게 쪼개 엮어서 만들었기 때문에 등등거리라고도 불립니다. 이 등배자는 주로 모시 적삼 같은 저고리나 속옷 안에 착용하여 피부와 옷 사이의 공간을 만들어 주어 땀을 말려주고 달라붙지 않게 해주는 기능적인 옷입니다. 대부분 남성 노인들이 착용하였으며, 한복을 일상복으로 착용하던 1970년대까지도 일부 착용되었으나, 양장의 발달로 등배자는 자연스럽게 소멸되었습니다. 등배자와 등토수를 착용한 노인과 노점상 모습 출처: https://www.nongmin.com/article/20160614106556 등배자와 함께 손목에 바람이 통하게 하기 위하여 팔목에 끼워주는 등토수도 함께 소장되어 있습니다. 등나무 줄기를 엮는 방법에 따라 다양한 디자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등토수는 우리가 하나쯤 가지고 있는 쿨토시의 원조격이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손목에 토시를 사용하였습니다. 등토수 (왼쪽 1900년대 초, 오른쪽 1880년) 올 여름, 우리에게도 우리 선조들의 지혜로운 여름나기를 생각하며, 무더위를 건강하게 이겨내는 지혜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달의 유물 2023년 6월 :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 조선통신사 견문 국문가사

2023.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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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 : 조선통신사 견문 국문가사 ▪ 필사본(筆寫本), 선장(線裝), 2권 2책, 35×22.3cm ▪ 조성연대 1877~1879년 일동장유가는 김인겸(金仁謙, 1702~1772)이 계미통신사의 삼방서기(三房書記)로 한양을 출발하여, 당시 일본의 정치중심지인 에도〔江戶〕를 다녀와서 복명(復命)하는 1763년 8월 3일부터 1764년 7월 8일까지 11개월 간의 사행 견문을 담은 국문 가사입니다. 작가인 김인겸은 57세 되던 해인, 1763년 일본을 다녀오면서 수로(水路) 3,332리, 육로(陸路) 1,332리 등 총 4,664리의 일본 사행길에서 겪은 모든 경험을 일동장유가에 담아냈다. 그는 한문사행록인 『동사록(東槎錄)』도 지었으나 자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일동장유가는 한글로 지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일동장유가 표지 전체적인 내용은 서사(序辭)→ 등정(登程) → 목적지(目的地) → 회정(回程) → 결사(訣辭)의 사행 견문(노정)에 따라 곳곳에서 일어난 사건, 일본의 풍속, 외교임무의 수행과정 등을 기록하였습니다. 조선통신사 래조도 (신호시립박물관) 조선통신사 귀로행렬도(정사부분) 필사본으로 2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체는 단정한 정자 흘림체로 19세기 후반부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민간 서체로 쓰여 있습니다. 표지에는 일동장유가‘권지일’, ‘권지이종’ 이라고 묵서로 쓰여 있다. 2책 모두 매면 4단으로 되어 있습니다. 일동장유가 본문 우리 박물관 소장 일동장유가는 연민 이가원선생이 1987년 6월 기증하여 소장하게 된 것으로 학계에서는 ‘연민본’ 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박물관의 연민본 이외에 현재 전하고 있는 일동장유가는 ① 규장각 가람본, ②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③ 연세대학교 도서관 소장본 등이 있습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과 연세대 도서관본은 낙질본(落帙本)이라 전체 내용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일동장유가 전체 내용을 온전하게 구비하고 있는 이본으로는 우리 박물관의 연민본과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의 가람 이병기 박사가 소장하고 있던 가람본이 있습니다. 가람본과 연민본을 비교해 보면 철자법, 지질, 먹색 등으로 보아 가람본이 더 후대의 것으로 추정되며 내용적인 면에서도 우리 박물관의 연민본이 63구(句)가 더 많으며 정제되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어 더 오래된 선본(善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소 소장 일동장유가 또한 우리 박물관 소장 일동장유가는 권1, 권2 마지막 페이지에 필사(筆寫)연도와 성책(成冊)연도, 책주(冊主)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온전한 내용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서지정보를 갖춘 유일한 필사본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일동장유가 필사연도, 성책연도 기록 부분 우리 박물관의 일동장유가는 다른 판본에 비해 그 내용이 풍부하고 오래되었지만 본문이 충해(蟲害), 수침으로 인한 물얼룩, 변색, 밑단 찢김 등 보존상태가 좋지 않다는 점이 항상 단점으로 지적되었습니다. 하지만 국가기록원의 2022년 맞춤형 복원·복제 지원서비스 사업으로 1여 년의 복원작업 끝에 결실부를 보강하고 원표지를 복원하여 보존상태가 개선되고 확인되지 못했던 글자도 일부 확인되었습니다. 복원 전 복원 후 박물관에서는 2022년부터 소장 고문헌의 문화재 지정을 위해 문화재 지정 추진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첫 번째 결실로 일동장유가는 2022년 11월 경기도 유형문화재 예비심사를 거쳐 2023년 5월 25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이달의 유물 2023년 5월 : 활옷(전통 여성 혼례복)

202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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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6월 6일, 창덕궁에 있던 구 왕실재산관리처에 발생한 의문의 화재로 안타깝게도 그곳에 소장되어 있던 활옷이 거의 불타고 활옷의 앞길 조각만 남게 되었습니다. 故 석주선박사는 화재가 발생하기 1년 전인 1959년 6월부터 약 5개월에 걸쳐 지도하던 제자들과 창덕궁에 소장된 활옷의 복제품을 제작하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활옷 복제품 앞길의 안쪽에는 작업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과 뒷길 안쪽에는 ‘1955 石宙善古典衣裳硏究所藏’를 자수해 이 활옷이 복제품임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화재 수습 후 故 석주선 박사는 활옷을 복제했던 인연으로 창덕궁 관계자로부터 불타고 남은 활옷 조각을 양도받았다고 전해집니다. 불에 타버린 조각은 원래의 형태와 색상을 잃어버렸지만, 역사의 흔적으로 간직되어있습니다. 창덕궁 화재 시 타고 남은 활옷 조각 1960년 6월7일 구황실재산관리총국의 화재 사건을 전하는 ‘동아일보’ 기사. (출처:https://weekly.donga.com/List/3/all/11/80459/1) 1959년 故 석주선선생이 제자들과 함께 제작한 창덕궁의 활옷 복제품(앞) 1959년 故 석주선선생이 제자들과 함께 제작한 창덕궁의 활옷 복제품(뒤) 활옷은 조선시대 여성들이 입었던 예복의 한 종류로 왕실 여성의 혼례복인 홍장삼(紅長衫)과 같은 옷으로 추정됩니다. 19세기 말부터는 사대부가와 평민 여인들 모두 입는 예복이 되었습니다. 활옷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화의(花衣, 華衣)에서 기원한 것으로 크다는 뜻의 ‘하’와 ‘옷’이 합쳐져 ‘하옷’–‘할옷’–‘활옷’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예식에 입는 큰 옷을 의미합니다. 활옷의 가장 큰 특징은 의복 전체가 화려한 자수로 장식되었다는 점입니다. 앞 길이가 뒤보다 짧고 소매는 색동과 흰색의 한삼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또한 활옷의 색상은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옷 전체의 색상인 홍색은 벽사와 길상을 의미하며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신부복의 색상으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겉감의 홍색과 안의 청색은 음양의 조화를 뜻하며 소매의 색동은 화려함과 행운을, 그리고 백색의 한삼은 정숙함을 뜻합니다. 활옷의 앞길 아래에는 파도와 괴석을 배치하고 좌우에 봉황이 마주 보도록 수놓았습니다. 뒷길과 한삼에는 모란, 연꽃, 나비, 백로 등이 다채로운 색상으로 수놓아 장식되어 있습니다. 이 문양들은 남녀의 사랑과 인연, 부귀와 다산 등을 상징하는데 결혼하는 두 남녀의 행복한 결혼생활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앞길의 봉황과 모란, 뒷길의 연꽃과 백로, 나비와 모란 등 활옷의 다양한 문양 우리나라의 풍습 중 섭성(攝盛)은 중요한 행사에 신분이나 품계에 관계 없이 최고의 옷을 입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민가에서도 활옷과 같은 궁중 예복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자수로 복식 전체를 장식하는 활옷은 개인이 쉽게 만들기 어려웠기 때문에 대여해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대의(貸衣) 풍습은 조선 후기에는 관청에서 관리하다 19세기 이후에는 개인사업자가 등장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점을 세물전(貰物廛)이라고 합니다. 세물전을 통해 예식에 필요한 옷과 치장구를 구할 수 있었기에 당시의 왕족이나 평민의 혼례식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활옷은 모든 계층의 여인들이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아름다운 혼례를 치를 수 있었던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복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물전 신문 광고(출처 : 매잀니보, 1933.9.25), 덕흥사세물전 전경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재인용) 혼례날 신부의 머리나 화장이 닿아 생기는 오염을 방지하기위해 목선 뒷부분에는 한지로 만든 복숭아 모양의 바대를 덧대고 한삼에도 한지를 덧대었다. 1990년대 초반 반가에서 착용했던 활옷으로 문양이 다소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현대에는 활옷을 결혼식 후 신랑 신부가 전통 혼례복을 입고 치르는 폐백에서 신부들이 입습니다. 새로운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는 폐백은 신랑 신부가 자식을 많이 낳아 행복한 가족을 이루고 오랫동안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축복하는 의식입니다. 이러한 행사에 신부의 앞날에 대한 축복의 염원을 가득히 담고 있는 활옷은 신부가 입기에 더없이 적합한 옷입니다. 참고문헌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2009, 『박물관 신축 개관 전시 도록』 석주선(1975), 『衣』,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 권혜진(2009), 『활옷의 역사와 조형성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인터넷 동아일보:https://weekly.donga.com 한국문화재재단(2021), 「혼인-의복에 담긴 사랑, 전통 혼례복 활옷」, 『월간문화재 가을호-사랑과 전쟁』.

이달의 유물 2023년 4월 : 기와 장인(匠人)의 자화상(自畵像) 얼굴무늬 기와

202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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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무늬 기와는 평기와(암키와)의 배면(背面)에 사람의 얼굴을 음각(陰刻)한 기와편입니다. 내면에는 포목흔(布木痕), 측면에는 안쪽에서 그은 분할흔(分割痕)이 확인되어 제작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얼굴무늬 기와 기와에 예리한 도구를 이용하여 새겨진 얼굴은 눈웃음을 짓고 있으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웃는 모습으로 과하지 않은 매우 선하고 친근한 모습입니다. 얼굴무늬 기와(내면) 현재 모습으로 보아 기와를 기와 성형틀(瓦桶)에서 떼어낸 다음 가마에서 소성하기 전에 기와 표면을 물손질하여 문양을 지우고 얼굴을 새긴 것으로 보입니다다. 얼굴무늬기와 제작 순서 기와 성형-성형틀 제거-분할-건조-물손질-얼굴 새김-가마 소성 얼굴무늬 기와 세부 얼굴을 새기기 전에 물손질하였는데, 제작과정에서 타날판으로 두르려 새겨진 무늬가 희미하게 확인됩니다. 기와 장인의 자화상(自畵像)? 이 기와는 당시 기와를 만들었던 장인(匠人)의 단순한 장난으로 새긴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고려시대 불사(佛寺) 공역(工役)에 참여한 와장(瓦匠)의 심리와 종교적 신념을 추측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완전한 국가 종교가 되었습니다. 고려는 국가이념이나 국가 정책의 기본 방침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근간으로 하는 국시(國是)를 채택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고려는 불교국가로서 왕실과 귀족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불교를 믿고 숭상하였습니다. 이러한 사회풍토에서 사찰 공역에 참여한 기와 장인은 불교의 극락왕생을 이룰 수 있다는 종교적 믿음에서 이와 같은 얼굴을 새기진 않았을까? 더욱 부처님 계신 법당의 지붕이라는 상징성에서 불국토에서 부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부처님과 함께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본 것은 아닐까?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 신라시대 국립경주박물관 소장(보물 제2010호) 얼굴무늬 수키와 양양 진전사터, 고려시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A1719) 얼굴무늬(女) 마룻기와(망새) 포항 해봉사, 조선시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A1046) 얼굴무늬(男) 마룻기와(망새) 포항 해봉사, 조선시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A1047) 영월 흥교사 기와가 출토된 흥교사터(興敎寺址)는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흥월리의 태화산(太華山) 남록에 위치하는데, 김부식(金富軾, 1075 ~ 1151)이 쓴 [삼국사기(三國史記)] 비롯한 역사서에 따르면, 후고구려[태봉]를 건국한 궁예(弓裔, ? ~ 918.6)가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스스로를 선종(善宗)이라 한 곳인 세달사(世達寺)가 바로 흥교사입니다. 일연(一然, 1206~1289)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세규사(世逵寺)라 하였는데, 이는 세달사의 잘못된 표기[誤記]이며, 이보다 앞서 균여(均如, 923~973)의 [십구장원통기(十句章圓通記)]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1055 ~ 1101)의 기록을 통해서도 세달사와 흥교사가 같은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지도(동여비고)에 보이는 태화산 흥교사 (출처: 문화재청, 2004, [蒼嶺寺]) 1967년 4월 4일 단국대학교 박물관 정영호(鄭永鎬, 1934.11.3.~2017.4.7) 관장을 비롯하여 진홍섭(秦弘燮, 1918.3.8 ~ 2010.11.6.) 교수와 최순우(崔淳雨, 1916 ~ 1984) 선생은 신라오악종합학술조사(新羅五嶽綜合學術調査)의 태백산지구(太白山地區) 제5차 조사에서 폐허가 된 흥교사터를 처음 조사하였습니다. 이때, 법당(法堂)터, 계단석, 석축, 비전(碑殿)터 등의 유구(遺構)를 비롯하여 석탑재, 사각형 전돌[方形塼], 와당(瓦當) 등의 유물(遺物)을 확인하였습니다. 최근 여러 차례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창건되어 조선시대까지 법맥(法脈)이 이어진 사찰임이 밝혀졌습니다. 참고문헌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2009, 『박물관 신축 개관 전시 도록』 考古美術同人會, 1967.4, 「新羅五岳太白山地區調査」, 『考古美術』 通卷 第81 문화재청, 2004, 『蒼嶺寺』 영월군‧중부고고연구소, 2015, 『寧越 興敎寺址Ⅲ』 鄭永鎬, 1969.12,「新羅 獅子山 興寧寺址 硏究」, 『白山學報』7號, 白山學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 사진은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국립경주박물관 소장품 “人面文圓瓦當”을 이용하였음

이달의 유물 2023년 3월 : 국가민속문화재 제2호 심동신(沈東臣)의 금관

2023.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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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물은 조선 말기 문신인 심동신(沈東臣, 1824~ ?)이 착용했던 금관(金冠)으로 1964년 국가민속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어 어느덧 지정 60주년이 되었습니다. 심동신(沈東臣)의 금관 심동신은 순조 24년(1824)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사경(士敬)입니다. 철종 원년(1850) 증광시(增廣試) 을과(乙科)에 급제하였으며 황해도 관찰사, 의금부사, 사헌부대사헌 등을 지냈습니다. 이 유물은 심동신이 참판으로 있을 때 착용했던 것으로 후손들에 의해 보관되어 오다가 1948년 7대손인 최우씨로부터 조복(朝服)과 함께 故 석주선박사에게 전해진 후 우리 박물관에 기증되었습니다. 이하응 초상-금관조복본 (보물 제1499호, 출처:문화재청) 금관(金冠)은 문무백관이 조복(朝服)이나 제복(祭服) 차림을 할 때 함께 착용했던 관모로 금량관(金粱冠) 또는 양관(梁冠)이라고도 합니다. 조복은 조선시대 관료들이 나라에 큰 행사나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지낼 때나 설날[元旦]과 동지(冬至) 등에 착용한 예복입니다. 금관과 함께 착용하므로 ‘금관조복(金冠朝服)’이라고도 합니다. 심동신의 조복(국가민속문화재 제2호) 심동신이 조복과 함께 들었던 홀(笏) 조선시대 금관은 계급에 따라 관 상부의 금색선인 양(梁)의 수량이 구분되었습니다. 1416년(태종 16)에 문무백관의 조복제도를 정한 이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양관은 조복과 제복에 공통으로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1품은 5량관, 2품은 4량관, 3품은 3량관, 4·5·6품은 2량관, 7·8·9품은 1량관을 썼고, 왕세자는 강사포에 6량관을 쓰도록 정하였습니다. 이것은 명(明)에 대한 이등체강(二等遞降)의 원칙을 따른 것이었으나, 대한제국 시기 대한예전(大韓禮典)에는 칠양관제를 명과 동일하게 적용하도록 했습니다. 금관은 관 전면의 머리둘레 부분인 관무(冠武, 관의 앞쪽 이마에 닿는 부분)와 다음 두 개의 산봉우리 모양인 뒷면 장식판, 마지막으로 관 앞의 중심에서 정수리를 덮어 뒷면 장식판에 연결된 굽은 양주(梁柱)로 구성됩니다. 여기에 관의 뒷부분을 관통하는 나무비녀(木簪)와 관을 머리에 고정시키는 영(纓)이 함께 구성되어있습니다. 뒷부분 양옆에는 관무의 양 끝을 끼울 수 있는 고리가 달려있어 크기를 조정하고 고정할 수 있게 되어있습니다. 금관의 구조 심동신의 양관은 종선이 5개인 오량관(五梁冠)으로 높이는 19.7㎝이며 목잠(木簪)과 옥색의 술달린 끈[纓]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관무와 배면은 문양을 투조하여 새긴 후 금칠하고 양주는 죽사(竹絲)로 모양을 잡고 흑색 비단을 씌워 만들었습니다. 이때 사용된 흑색 비단은 신축이 우수한 추사(縐紗)가 사용되었습니다. 현전하는 유물은 5량관이 대부분이며, 정인학(鄭仁學, 1839~1919)의 육량관이 우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정인학(鄭仁學, 1839~1919)의 육량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