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유물
2026년 6월 : 배자(背子)
배자(背子)는 저고리나 포 위에 덧입는 겉옷으로, 조선시대 남성복과 여성복 모두에서 확인되는 의복이다. 좌우가 대칭인 맞깃 형태를 이루며, 일반적으로 엉덩이를 살짝 덮는 길이의 소매 없는 옷을 말한다. 오늘날의 조끼와 비슷한 형태로 알려져 있으나, 유물 자료에서는 소매가 있거나 길이가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형태도 확인된다. 배자는 활동이 편리하고 보온 효과가 뛰어나 계절과 용도에 따라 다양하게 활용되었다. 조선시대 배자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사례편람(四禮便覽)』 등 여러 문헌에서 확인된다. 오늘날에는 출토복식(出土服飾)과 전세유물(傳世遺物), 궁중유물을 통해 그 종류와 형태, 색상 및 활용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사진 1) 배자를 착용한 모습 『조선시대 우리옷의 멋과 유행』, 2006,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출토복식으로 전해지는 배자는 조선시대 사대부와 일반 계층에서 착용하였던 배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무덤에서 발견된 배자들은 제작 당시의 형태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복식 복원 연구의 기초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길이와 구조가 다양하게 나타나며, 당시의 재단법과 봉제기법, 착장 문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사진 2) 배자(여성용)파평윤씨 묘 출토복식(1735-1754년) 사진 3) 배자(남성용)밀창군 이직 묘 출토복식(1677-1746년) 사진 4) 배자(남성용)동래정씨 묘 출토복식(1574-1669년) 특히 출토유물 가운데에는 '등거리(背居里)'라 불리는 독특한 형태의 배자도 확인된다. 등거리는 오늘날 숄과 같이 어깨에 걸쳐 착용하는 의복으로, 보온성과 실용성을 동시에 갖춘 조선시대 생활복의 한 예라 할 수 있다. 사진 5) 등거리정응두 묘 출토복식(1508-1572년) 사진 6) 등거리탐릉군 이변 묘 출토복식(1636-1731년) 전세유물로 전해지는 배자는 조선 후기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실제 생활 속에서 사용되었던 모습을 보여준다. 다양한 색상과 직물이 사용되었으며, 착용과 수선의 흔적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생활문화와 의생활을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왕실에서 사용된 배자는 고급 직물과 정교한 봉제 기법을 통해 궁중 복식의 품격을 보여준다. 아래(사진 7) 유물은 조선 제26대 국왕인 고종이 평상시 방한용으로 착용하였던 배자이다. 용무늬가 직조된 황색 영초단((英綃緞)을 겉감으로 사용하고 녹색 융을 안감으로 덧대어 제작하였으며, 가장자리에는 검은 선을 둘러 마감하였다. 뒷길이 앞길보다 길고 양옆이 완전히 트여있으며, 진동 부분에 고리를 달아 끈으로 여밀 수 있도록 하였다. 이 배자는 왕실 복식에서 나타나는 정교한 봉제 기법과 세련된 색상 배합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사진 7) 고종 배자(1870년) 근·현대 여성용 배자는 남성용 배자에 비해 길이가 짧고 장식성이 강조되는 특징을 보인다. (사진 8)은 석주선 박사가 생전에 착용하였던 털배자로, 분홍색 숙고사(熟庫紗) 안에 토끼털을 대고 가장자리에 검은 털을 둘러 장식하였다. 겨울철 방한용으로 착용되었으며, 평양을 비롯한 서북지역에서는 신부의 혼례복으로도 활용되었다. 이 배자는 '등걸이 털배자', '어깨띠기' 등의 이름으로도 불렸다. 사진 8) 여성용 털배자(1928년) 사진 9) 평양지방의 혼례복으로 배자를 입은 모습 『북한지방의 전통복식·개화이후-해방전후』, 1998,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이번 ‘이달의 유물’에서 소개한 배자는 단순한 덧옷이 아닌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활과 미의식, 그리고 복식문화를 담고 있는 유물이다. 출토복식은 당시의 형태와 제작기법을, 전세유물은 생활 속 착용 문화를, 궁중유물은 왕실 복식의 품격을 전하며 조선시대 배자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26.06.04 0 157
2026년 5월 : 고려말 문신 한수의 시집, 『유항선생시집(柳巷先生詩集)』
목판본(木版本), 1400년(조선 정종 2) 선장(線裝), 불분권(不分卷) 1책, 상하단변(上下單邊) 좌우쌍변(左右雙邊), 반곽(半郭) 17.7×10.9cm, 유계(有界), 11행 20자, 흑구(黑口), 下向黑魚尾27.2×14.7cm 유항선생시집은 고려말 문신이자 시인, 명필가로 이름을 날린 유항 한수 (柳巷 韓修, 1333~1384)의 시집이다. 한수가 지은 146제(題) 218수(首)의 시가 실려 있으며 시문 외에 권근(權近)의 서, 이색(李穡)이 찬한 한수의 묘지명, 우왕(禑王)의 교서, 윤희종(尹會宗)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다. 『유항선생시집』표지 『유항선생시집』권수제(卷首題) 부분 한수는 슬하에 4남 6녀를 두었는데 그의 아들인 한상경, 한상기는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조선 전기 권신인 한명회(韓明澮, 1415~1487)가 그의 증손이다. 한수는 어려서부터 시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 가정(稼亭) 이곡(李穀)에게 칭찬을 받았다. 13세에 묘련사(妙蓮寺)에서 댓구 연구시(聯句詩)를 지어 좌중의 여러 선비와 시승들을 경탄시켰다는 일화가 전한다. 또한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로 신돈의 전횡을 우려하여 공민왕에게 신돈을 경계하라는 밀계를 올렸다가 전직되기도 하였다. 한수는 글씨에도 뛰어나 명필로도 이름을 날렸다. 특히 초서와 예서에 뛰어났다고 전해지는데 17세에 이곡이 찬한 조위(趙瑋)의 묘비문을 썼으며 노국대장공주묘비(魯國大長公主墓碑)·회암사지공대사탑비(檜巖寺指空大師塔碑) 등과 현존하는 여주 신륵사보제선사사리석종비(神勒寺普濟禪師舍利石鐘碑)에 글씨를 남겼다.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국가유산청)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비 탁본 『유항선생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한수가 45세가 되던 1377년 경부터 52세(1384년) 사망시까지 창작된 작품으로 거의 말년 작품에 해당한다. 한수가 유배 혹은 여행 중에 지은 시를 비롯하여 안부를 묻는 편지글 형태의 시, 선물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는 시, 자연이나 명승지에 대한 감흥을 읊은 시, 이별의 감상을 적은 전별시, 죽음을 애도하는 추모시 등 다양한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다른 사람 시의 운자(韻字)를 따서 시를 짓기도 했는데 고려말 성리학의 대가인 목은 이색(李穡, 1328~1396)과의 차운시가 78수로 수록된 시의 1/3이 넘는다. 한수와 목은의 인연은 10대부터 시작되어 한수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의 40년 간 함께 하였다. 특히 말년에는 서로 이웃해 살면서 수시로 왕래하고 교유하는 절친한 사이였다. 목은 이색 초상화(국가유산청) 先生百世師 出處喜攀追不但幸同里 仍蒙屢枉詩只隨人用捨 恐卜世興衰羽翼靑冥上 難求報我知 선생은 백세의 스승이어서나아감과 물러남에 따름이 기쁘네.단지 같은 마을에 살 뿐 아니라 게다가 여러 번 몸소 주는 시를 받았네.다만 사람들이 쓰고 버림에 따를 뿐인데세상의 홍함과 쇠함을 점치는 일이 두렵네.푸른 하늘로 날아오르게 되면나에게 알려 주기를 바라기 어려우리. 위의 시는 한수가 유포(柳浦)에 다녀온 후 목은이 오언팔구(五言八句)의 시를 보여주자 한수가 차운한 시이다. 한수는 목은에 대해 ‘백세의 스승’이라고 칭하며 존경과 애정을 나타내고 있다. 고려말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말년에 정계 일선에서 밀려나 있는 신세의 쓸쓸함도 엿보이는데 이들은 시를 통해 문학적 감성을 나누며 서로를 위로했음을 알수 있다. 시를 주고받으며 형성된 문학적 공감대는 단순한 친분을 넘어, 당대 지식인 사회의 정신적 흐름과 교유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우리 박물관 소장 『유항선생시집』은 한수의 사망 이후 그의 둘째 아들 상질(尙質)이 유고(遺稿)를 수집하여 편차하고 권근에게 비점과 서문을 받아 정리한 정고본(定稿本)을 한수의 제자인 전라도 관찰사 성석용(成石瑢)과 금산현감 이균(李均)이 1400년(정종 2년) 금산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초간본이다. 이후 한수의 후손인 한준겸에 의해 1602년(선조 35) 중간본이, 한재익에 의해 1863년(철종 14년) 삼간본이 간행되었다. 동일 판본의 초간본은 임진왜란을 거치며 다 불타버리고 하버드 옌칭도서관, 고려대학교 만송문고 등 총 3책만이 국내·외에 전하고 있다. 그 중 우리 대학 소장본은 온전한 구성을 갖추고 있어 체제와 내용이 완전한 국내 유일본으로 평가받고 있다. 본 박물관본 표지 고려대 만송본 표지 하버드 옌칭본 표지 『유항선생시집』은 서지학적으로도 개인 문집 간행의 과도기적 상황을 보여준다. 이전에 간행된『급암선생시집(及菴先生詩集)』, 『설곡시고(雪谷詩藁)』 등 14세기 이전 문집은 계선(界線)이 없고, 흑구(黑口) 혹은 어미(魚尾)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유항선생시집』 등장 이후인 15세기부터는 유계(有界), 흑구(黑口), 상하하향흑어미(上下下向黑魚尾)의 판식(板式)을 볼 수 있다. 이는 서지적으로 조선 초기 개인 문집의 시대적 특징을 반영한 것이다. 이처럼 『유항선생시집』은 극히 드문 당대의 문집으로, 고려말 및 조선 초 목판본의 서지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급암선생문집(문화유산청) 설곡시고(문화유산청) 우리 박물관 『유항선생시집』은 2025년 10월 서문·발문·판식·구성이 온전해 초간 당시 원형을 가장 정확히 보여주는 자료이며 극히 드문 고려시대 문인들의 시문집이라는 점을 높이 평가받아 국가지정문화유산 ‘보물’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김윤주, 「고려 우왕대 이색과 한수의 교유와 시(詩) - 『목은시고』, 『유항시집』의 차 운시를 중심으로」, 『사학연구』126, 2017. 성범중·박경신 [공]편, 『한수와 그의 한시』, 국학자료원, 2004. 안영훈, 「14세기 말 사대부 교유시(交遊詩)의 한 양상-李穡, 鄭樞, 韓脩의 교유를 중심으로」, 『국어국문학』147, 2007 옥영정, 「새롭게 확인된 여말선초 초간본 문집 3종의 서지적 특징과 가치」『서지학 연구』제96집, 2023.
2026.05.07 0 267
2026년 4월 : 석주명의 『한국산접류분포도』 친필 원고 H
제주왕나비(Parantica sitai) 분포도 (왼쪽-한국분포도, 오른쪽-세계분포도) 『韓國産蝶類分布圖』 (보진재, 1973년) 『한국산접류분포도』는 석주명(1908~1950)이 수행한 한국산 나비 연구의 핵심 성과를 집약한 실증 자료로 『韓國産蝶類分布圖』의 친필 원본이다. 석주명 사후 20여 년이 지난 1973년, 그의 여동생 석주선 박사가 보관하고 있던 분포도 원본을 편집하여 유고 도서로 간행하였다. 석주명 선생은 한국 근대 생물학의 형성 과정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남긴 과학자이다. 선생은 식민지라는 암울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도 1930년대부터 약 20년간 전국을 돌며 75만 마리에 이르는 나비를 채집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분석하였다. 그 결과 개체 변이를 통계적으로 해석하여 기존 분류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당시 일본 학자들은 나비의 미세한 변이까지도 새로운 종으로 간주하며 다수의 학명을 제시하였으나, 석주명선생은 방대한 자료에 기반한 분석을 통해 844개의 동종이명(同種異名, synonym)을 정리함으로써 분류체계를 바로잡았다. 이 친필 원고에 담긴 약 250여 종의 분포도는 단순한 지도를 넘어선다. 한반도 전역의 채집 지점을 점으로 기록한 이 자료는 한국 나비의 분포와 특성을 실증적으로 제시한 연구 성과이자, 한국 생물학의 학문적 수준을 세계에 알린 기념비적 기록이다. 연구실의 석주명(1932년) 여동생 석주선과 석주명 석주명 선생은 연구기간 동안 100여 편 이상의 학술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1940년에는 한국산 나비 연구를 집대성한 영문 연구서 『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를 발표했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 과학자가 영문으로 집필한 유일한 연구서이다. 이 밖에 『한국산 접류의 연구』 등 다수의 연구결과를 발표했으며, 이러한 학문적 성과의 기반이 된 자료 수집과 연구 과정의 결정체가 바로 이 분포도이다. 선생은 전국을 답사하며 나비를 채집하는 동시에 채집 지점을 지도에 기록하여 분포 연구를 병행하였다. 각 종의 분포 상태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서식 범위와 환경 조건을 종합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종과 환경 간의 관계를 밝히고자 하였다. 이러한 연구는 생태학 및 생물지리학적 관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분포도는 약 250여 종의 한국산 나비 각각의 채집 위치를 표시한 한국 지도와 국내외 학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확보한 자료를 바탕으로 분포 지역을 정리한 세계 지도로 구성되어 있다. 총 504장에 이르는 친필 원본은 각 종의 분포 양상을 한국과 세계의 범위에서 입체적으로 보여주며, 장기간의 현지 조사와 국제적 학술 교류를 통해 축적된 연구 성과를 시각적으로 집대성한 자료이다. 이러한 분포도는 석주명의 연구 과정과 성과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자료로서 그 과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2024년 ‘국가중요과학기술자료’로 등록되었다. 또한 그는 우리말과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을 바탕으로 나비의 이름을 순우리말로 짓는 일에 앞장섰다. 해방 이후 그가 직접 만들거나 정리한 한국산 나비 248종의 우리말 이름은 1947년 조선생물학회를 통해 최종 확정되었으며 각시멧노랑나비, 수풀알락팔랑나비 등 오늘날 사용되는 많은 이름들이 그의 손에서 탄생하였다. 그는 나비를 연구하는 학자인 동시에 우리말을 사랑한 언어학자였으며, 역사와 문화를 탐구한 인문학자이기도 했다. 석주명 선생은 1950년 한국전쟁 중 세상을 떠났으나, 이 분포도 원고는 그의 여동생 석주선 박사에 의해 보존되었다. 전란 속에서도 지켜낸 원고는 이후 우리 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이 방대한 분포도는 단순한 연구 기록을 넘어, 한 과학자가 자연과 학문, 그리고 민족을 위해 평생에 걸쳐 축적한 성과를 보여주는 자료이자,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한국 생물학의 중요한 토대라고 할 수 있다. 『韓國産蝶類分布圖』 친필 원본(전체)
2026.03.31 0 537
2026년 3월 : 말(馬) H
‘말’은 생생한 생동감, 뛰어난 순발력, 탄력 있는 근육, 미끈하고 탄탄한 체형, 기름진 모발, 각질의 말굽과 거친 숨소리를 가지고 있어 강인한 인상을 준다. 그리하여 바로 박력과 생동감의 이미지를 가진다. 말에 대한 표현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한국인의 관념 속에서 말은 신성함, 상서로움, 그리고 신이함을 상징하는 동물로서 인식되어 왔다. ‘말’은 12띠 중 일곱 번째 동물로서 60갑자 가운데 갑오(甲午, 靑, 木)-병오(丙午, 赤, 火)-무오(戊午, 黃, 土)-경오(庚午, 白, 金)-임오(壬午, 黑, 水)로 순행하며, 시(時)는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까지, 방위는 정남(正南)에 해당한다. 2026년, 병오년은 ‘붉은 말〔赤馬〕’의 해로 병오년에 태어난 사람들은 성품이 호방하고 개방적이며, 사람을 잘 사귀고, 저돌적·직설적이나 뒤끝은 없다고 한다. 또 지극한 양(陽) 가운데 음(陰)이 시작하는 ‘문명의 불’로서 어둠을 밝히고, 정신세계·교육·종교·예술·문화 등에 재능을 갖고 있으며, 육체적 활동보다는 정신적 활동에 유리하다고도 한다. 인류 역사상 ‘말’은 지금으로부터 6000여 년 전 중앙아시아에서 가축화가 이루어졌고, 5000년 전쯤에는 중동과 유럽으로 확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의 가축화는 단순한 동물 길들이기 차원을 넘어 인류의 사회 구조와 기술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제주도 정의현의 말 (「정의조점(㫌義操點)」 부분, 1702년, 국립제주박물관) 1702년(숙종 29)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은 41점의 탐라순력도를 남겼는데, 제주의 삼 읍을 점검하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장면을 그렸다. 그림은 정의현을 점검할 때 모습을 그린 「정의조점」에 표현된 제주 말의 모습이다. 한국 고대 건국신화에서 ‘말’은 부여 금와왕(金蛙王), 고구려 주몽, 신라 박혁거세 등이 탄생할 때 상서로움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말’은 땅과 하늘,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고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여 피장자의 영혼을 저세상으로 보내준다고 믿었다. 경주 구정리 방형분 말상(午像) 탁본 (신라,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경주 김유신묘 말상(午像) 탁본 (신라,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경주 흥덕왕릉 말상(午像) 탁본 (신라,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경주 경덕왕릉 말상(午像) 탁본 (신라,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한편, 삼국지「위서 동이전」에는 부여(夫餘)의 명마(名馬) 기록과 변(弁)・진한(辰韓) 사람들이 말을 탄다는 등의 관련 기록이 많다. 청동기시대 이후에는 말모양띠고리(마형대구) 장식을 몸에 지니고 다녔는데, 특히 원삼국시대 영남지역과 충청내륙을 중심으로 출토되는 지역적인 특수성을 보이고 있다. 말모양띠고리(馬形帶鉤) (경주 출토, 삼국시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청동제 허리띠의 맺음 부분으로 갈기가 과장되게 표현되었으며, 가슴에 긴 고리가 달려있다. 토제말 (傳 개경 출토, 고려시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토제 말의 머리 부분으로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이며, 입 주변과 턱에 서기(瑞氣) 무늬를 새겨 상서로움을 표현하였다. 그릇 모양〔器形〕이나 동물을 본떠서 만든 토기, 즉 토우(土偶)나 토용(土俑)은 당시 사람들의 뛰어난 조형감각을 잘 나타내고 있다. 기마인물 토기나 오리형 토기 등이 대표적이지만 단독으로 표현된 말은 의물(儀物)로서 토용의 주요 대상 동물로 애용되었으며, 대체로 마구(馬具)를 갖춘 상태로 표현되었다. 신라의 기마인물형토기 (국보, 경주 금령총 출토,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가야의 기마인물형토기 (국보, 가야, 국립경주박물관,e뮤지엄) 토제 말(馬形土俑) (신라시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붉은 색을 띠는 토제 말로 머리와 목이 길고 갈기가 강조되었으며, 재갈과 안장 등 마구를 표현하고 있다. 토제말(馬形土俑) (부분, 신라시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토제말(馬形土俑) (부분, 신라시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이와 같은 고대의 토용은 장난감이나 애완용으로 만들어진 것, 주술적인 우상(偶像)으로서의 성격을 가진 것, 무덤에 넣기 위한 부장용(副葬用)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토용은 삼국시대의 신라·가야에서 출토 사례가 풍부하고 다채로운 면모를 가지고 있다. 고려시대의 경우 그 사례가 확연히 줄어들며, 조선시대에 이르면 죽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磁器)로 만들어 부장하는 명기(明器)의 제작이 두드러지는데, 인물·동물·생활용구 등을 많이 만들었다. 독립된 형태의 토용이건 장식용의 토우(土偶)이건 이들은 당시의 우주관(宇宙觀)이나 사생관(死生觀)을 해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외형상의 관찰만으로도 당시의 생활상·사회상을 짐작하게 하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 참고문헌> 국립민속박물관, 2025, 한국민속상진사전 말. 김중엽, 2021, 「원삼국시대 마형대구의 의미에 관한 고찰」, 마한백제문화 37.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1999, 새김예술-부처, 탑, 벗들.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2006, 搨影 名選 上.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뮤지엄(https://emuseum.go.kr/)
2026.02.27 0 1288
2026년 2월 : 색동옷 H
조선시대 색동으로 장식된 옷은 주로 돌부터 6세까지의 어린아이들이 주로 입었다. 색동은 저고리·마고자·두루마기·소품류 등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노랑·초록·파랑·빨강 등 다양한 색을 화려하게 사용하였다. 옛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새로 옷을 지어 입히면서 색이나 문양 등을 통해 아이의 건강과 미래를 축원하여 주었다. 특히 음양오행(陰陽五行)에 따른 오방색(五方色)을 넣어 지은 색동옷에 호환 마마와 같은 액운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와 무병장수의 의미를 담았다. 오방색은 동서남북 방위와 계절 등 자연과 인간이 서로 대립하고, 조화를 설명하는 음양오행설에 기초로 맞춰 청색과 적색, 백색, 흑색, 황색의 색이 전해주는 에너지를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색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오방색 주머니가 석주선기념박물관에 다수 소장되어 있다. 조선의 마지막 공주인 순조의 막내딸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1844) 집안의 유물에서 옷 외에 소품들도 함께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림 1) 오방색 주머니 그림 2) 오색실타래 위의 유물은 오방색 주머니(그림1)와 돌잡이 물품인 오색실타래(그림2)이다. 주머니는 각각 동서남북 방위에 맞춰 비단을 배열하고 중앙에는 사각형의 황색 비단을 대어 만들었으며, 오색실타래는 긴 실을 오방색과 간색(間色)으로 염색한 뒤 타래를 틀어 묶어 화려하게 꾸며주었다. 오행을 갖추어 나쁜 기운을 막으며, 긴 실처럼 돌을 맞은 아이가 장수하기를 바란 것이다. 그림 ) 해평윤씨 묘 출토 중치막과 색동 두루마기 그림 3) 해평윤씨 묘 출토 중치막과 색동 두루마기 2001년 11월 14일, 경기도 양주시에 있는 해평윤씨 집안의 한 무덤에서 17세기 중반으로 추정되는 여섯 살 소년의 미라가 발견되었다. 출토 당시, 소년 미라가 입고 있던 옷에 깃· 소매·무·섶을 몸판과 다른 색상으로 만들어 준 중치막(조선시대 남자들이 흔히 입었던 외출복)을 보면, 색상이 남아있는 근대의 색동두루마기와 배열과 구성이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그림3,4) 그림 4) 오방색을 기준으로 배색한 복원품 2022년 해외 특별전시(카자흐스탄)모습 특히 명절에 입는 아이들의 옷에서 색동옷의 특징을 가장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색동과 함께 길한 글귀를 금박이나 자수로 새겨 넣은 화려한 모자를 함께 갖추어 입혀주었다. 그림 5) 전통 돌복 그림 6) 다양한 아동 모자 그림 7) 색동 마고자 그림 8) 돌복과 명절 모습 엘리자베스키스 작, 국립민속박물관소장 색동옷은 6세 이하의 어린이들이 주로 착용하였지만, 성인이 된 이후 색동옷을 입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날은 바로 본인 환갑에 착용했던 색동마고자와 굴레이다. 이 유물은 덕온공주의 손녀 윤백영 여사가 환갑을 맞은 아들에게 직접 지어 준 옷으로, 노래의(老萊衣)라고 불린다. 노래의는 중국의 고사(故事)에서 비롯된 것의 하나로 중국 초나라 선인 노래자(老萊子)가 늙은 부모를 즐겁게 해 드리려고 70살이 넘어서도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부린 일화를 말한다. 이를 본받아 우리나라에서도 자신이 환갑이 될 때까지 부모가 살아계시면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처럼 춤을 추어 부모를 기쁘게 하였는데, 이때 착용했던 옷이다. 이런 유물을 통해 부모의 마음은 자식이 환갑이 되어도 항상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것임을 느끼게 한다.(그림9, 10) 그림 9) 노래자해서(老萊子解書) 그림 10) 색동옷을 입은 모습 “유승목이가 회갑(回甲)인데 … 그의 어머니 윤백영이 81세로 생존한 고로 노래자(老萊子)의 채무반희(彩舞斑戱)하는 형식으로 굴레와 색등거리와 수(繡) 버선 입고 장난감 가지고 흔들고 놀고 허리띠 매고 주머니 차고 친족과 보는 사람들이 주머니에 돈 넣어 주었나이다.” 윤백영, 「노래자해서」 중 (1968) 이번 ‘이달의 유물’에서 소개한 조선시대 색동옷은 아이들의 외출복이자 명절옷으로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나쁜 기운을 막아주고자 했던 옛 어른들의 간절한 기원이 표현된 옷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에도 박물관에서는 이러한 전통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돌사진 촬영하기’ 체험프로그램을 통해 돌을 맞은 아이에게 색동한복을 입혀서 돌사진을 찍어주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림 11) 2025년 석주선기념박물관 체험프로그램 ‘돌사진 촬영하기’ 모습 참고자료 : 제37회 특별전 마음을 담아 지은 사랑 아이 옷 도록(2018)
2026.02.04 0 1689
2026년 1월 : 책 표지에 담긴 멋, 능화판(菱花板) H
능화판은 책의 표지나 천에 문양을 찍어내거나 눌러 장식 효과를 내는 데 사용했던 목판(木板)이다. 주로 책 표지의 무늬를 장식할 때 사용되었다. 책을 실로 묶어 제본했던 전통적인 ‘선장(線裝)’ 방식에서 책 표지를 튼튼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방법이었다. 먼저 목판에 문양을 새겨 능화판이 완성되면 치자나 쪽물로 노랗게 물들인 표지를 능화판 위에 놓고 밀랍(蜜蠟)을 칠한 후, 밀돌로 문지르면 능화판의 요철에 눌려 표지에 무늬가 새겨졌다. 또한 여러 겹으로 배접된 표지가 압축되고 표지에 밀랍의 기름기가 올라와 기능 면에서도 더욱 견고한 표지가 완성되었다. 능화판은 고려시대부터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지나 실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후 조선시대를 거쳐 꾸준히 제작되다가 근대에 서양식 제본기술이 들어오면서 점차 사라졌다. 능화판의 형식과 문양의 종류는 다양하다. 목판에 새겨진 형식을 보면 목판의 한 면에만 새겨지거나 혹은 양면 모두 새겨졌다. 양면에 새겨진 경우는 모두 능화판 무늬가 새겨진 경우가 대부분이나 가끔 시전지판((詩箋紙板)이나 목판인쇄가 새겨진 것도 있다. 능화판은 목판 인쇄와는 달리 글자가 아닌 문양을 중심으로 제작되었으며, 종이 표면에 입체감을 부여해 시각적·촉각적 효과를 동시에 만들어냈다. 국화문 능화판 능화판 뒷면에 시전지판이 새겨진 모습 '능화(菱花)'란 마름꽃 무늬를 뜻하지만, 실제 능화판에는 마름꽃을 비롯해 연꽃, 국화, 모란, 당초문, 기하문 등 다양한 문양이 새겨졌다. 이러한 문양은 단순한 장식을 넘어 번영과 행복을 기원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박쥐오복·만자문 능화판, 71.7×25cm 박물관 소장 능화판은 박쥐와 만자문(卍字文)을 조합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운데 2개의 커다란 원 안에 1마리의 박쥐를 중심으로 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박쥐 4마리가 서로 연결되어 조각되어 있고 그 주변으로 만(卍)자문이 사방 연속으로 가득 차 있다. 조선시대에 박쥐 문양은 박쥐를 뜻하는 ‘복(蝠)’자가 복을 뜻하는 ‘복(福)’과 음이 같아, 다복과 길운을 기원하는 상징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다섯 마리의 박쥐는 수(壽)·부(富)·강녕(康寧)·유호덕(攸好德)·고종명(考終命), 즉 인생의 다섯 가지 큰 복인 ‘오복(五福)’을 의미한다. 함께 새겨진 만자문(卍字文)은 한자 만(卍)자를 가운데에 두고 끝을 직선으로 연결하여 또 다른 만자와 연속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만자문은 장수와 번영, 영원을 상징한다. 박쥐오복문과 만자문이 결합된 이 능화판은 단순한 장식을 넘어 오복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깃들어 있다. 다른 한 면에는 만자문만 연속적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이렇게 기하학적이면서도 단정한 문양을 반복적으로 새겨 넣은 것은 인쇄물에 격조와 미감을 더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능화판은 일상 속 책에도 아름다움을 더하고자 했던 전통 사회의 미의식과, 이를 구현한 장인의 정교한 손길을 전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박쥐오복·만자문 능화판의 뒷면 만자문 능화판 만자문 책표지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태우, 菱花板 硏究, 영남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1 박물관 신문 「조선시대 목판전-면과 선의 세계」, 2002
2026.01.05 0 1826
2025년 12월 : 조선의 방한모, 휘항(揮項) H
휘항(揮項) 흑공단, 토끼털, 길이 62.5㎝, 아래 너비 60㎝ 조선의 겨울은 유난히 길고 추웠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머리와 귀, 목을 동시에 보호할 수 있는 방한구를 발전시켰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휘항(揮項)입니다. 휘항은 조선시대 남성이 착용하던 방한용 쓰개로, 호항(護項)·풍령(風領)·휘양(揮場)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습니다. 휘항은 얼굴만 남기고 머리 뒤와 양쪽 귀, 그리고 목덜미 전체를 여유 있게 덮을 만큼 크고 넉넉한 형태이며, 앞쪽의 양옆에는 넓고 긴 끈이 달려있어 앞에서 단단히 여밀 수 있습니다. 외출 시 차가운 바람으로부터 신체를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휘항은 재질과 용도에 따라 다양하게 제작되었습니다. 겨울철에는 비단 겉감과 모피 안감을 갖춘 ‘털휘항[毛揮項]’이 상류층에서 주로 사용되었으며, 실용성과 경제성을 중시한 ‘무명휘항[木揮項]’은 면직물을 사용해 일상적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또한 환절기에는 얇은 사(紗)를 사용한 ‘양휘항(涼揮項)’ 등 계절에 따른 착용 편의를 고려한 다양한 형태가 나타났습니다. 흑립 아래 휘항을 착용하고 말을 타고 가는 선비 모습 – 출처: 심사정(1707~1769) <책건우려>,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268352&menuNo=200018 책가도 중 휘항을 걸어 둔 모습 – 출처: 책가도 8폭 병풍(冊架圖八幅屛風), 국립민속박물관 소장품 우리 박물관 소장품인 이 휘항은 겉감은 검은색 계열의 비단(흑공단)을 사용하고 토끼털을 안감으로 사용해 전체에 대어 주었습니다. 전체 길이는 약 62.5cm, 하단 둘레는 약 60cm로 머리와 목뿐 아니라 어깨까지 충분히 덮는 크기입니다. 앞에 넓고 긴 끈을 달고 안쪽에는 가늘고 짧은 끈을 달아 충분히 여며지는 것은 물론이고 외형적인 위엄을 갖도록 해서 기능과 디자인을 모두 고려한 구성입니다. 또한 장식을 위해 앞뒤에 붉은색의 봉술을 끈목으로 연결했는데, 붉은색 봉술은 시각적 화려함을 더하는 요소로, 앞쪽에 9개, 뒤쪽에 7개를 배치하여 좌우 균형감과 위엄을 강조했습니다. 이 휘항은 조선 사대부의 위엄과 실용성을 모두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입니다. 휘항의 옆 모습- 앞뒤의 봉술이 끈목으로 연결된 모습 휘항 앞에 부착된 9봉술 장식 휘항은 정수리 부분이 비어 있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는데, 이는 겨울철에도 관모(흑립 등)를 반드시 착용해야 했던 조선의 관모 예제(禮制)를 준수하기 위한 설계로, 방한성과 예장(禮裝)을 동시에 확보한 형태입니다. 오늘날 남아 있는 휘항 유물은 많지 않지만, 남아 있는 몇 점의 실물은 조선 장인의 바느질 기법, 모피 안감의 풍성한 질감 등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줍니다. 휘항은 단순한 방한구를 넘어, 조선의 일상에서 실용과 미감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입니다. < 참고문헌 > 전통문화포털 누리집 구글아트앤컬쳐 국립민속박물관 강순지·김은정(2008), 「문헌을 통해 본 조선시대 방한용 모 명칭에 관한 연구」, 『服飾』 58(7), 한국복식학회. 김성희(2007), 「조선시대 방한용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김창호·이미선·공수연 공저(2013), 『전통섬유와 복식공예』, 글누림. 안인실·이민정, 「휘항 재현품 제작을 위한 고증과 제작 방법 연구」, 『한국복식』 45,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2021.
2025.12.03 0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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