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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유물 : 색동옷

    조선시대 색동으로 장식된 옷은 주로 돌부터 6세까지의 어린아이들이 주로 입었다. 색동은 저고리·마고자·두루마기·소품류 등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노랑·초록·파랑·빨강 등 다양한 색을 화려하게 사용하였다.   옛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새로 옷을 지어 입히면서 색이나 문양 등을 통해 아이의 건강과 미래를 축원하여 주었다. 특히 음양오행(陰陽五行)에 따른 오방색(五方色)을 넣어 지은 색동옷에 호환 마마와 같은 액운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와 무병장수의 의미를 담았다.   오방색은 동서남북 방위와 계절 등 자연과 인간이 서로 대립하고, 조화를 설명하는 음양오행설에 기초로 맞춰 청색과 적색, 백색, 흑색, 황색의 색이 전해주는 에너지를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색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오방색 주머니가 석주선기념박물관에 다수 소장되어 있다. 조선의 마지막 공주인 순조의 막내딸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1844) 집안의 유물에서 옷 외에 소품들도 함께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림 1)  오방색 주머니 그림 2)  오색실타래       위의 유물은 오방색 주머니(그림1)와 돌잡이 물품인 오색실타래(그림2)이다. 주머니는 각각 동서남북 방위에 맞춰 비단을 배열하고 중앙에는 사각형의 황색 비단을 대어 만들었으며, 오색실타래는 긴 실을 오방색과 간색(間色)으로 염색한 뒤 타래를 틀어 묶어 화려하게 꾸며주었다. 오행을 갖추어 나쁜 기운을 막으며, 긴 실처럼 돌을 맞은 아이가 장수하기를 바란 것이다.     그림 ) 해평윤씨 묘 출토 중치막과 색동 두루마기 그림 3)  해평윤씨 묘 출토 중치막과 색동 두루마기       2001년 11월 14일, 경기도 양주시에 있는 해평윤씨 집안의 한 무덤에서 17세기 중반으로 추정되는 여섯 살 소년의 미라가 발견되었다. 출토 당시, 소년 미라가 입고 있던 옷에 깃· 소매·무·섶을 몸판과 다른 색상으로 만들어 준 중치막(조선시대 남자들이 흔히 입었던 외출복)을 보면, 색상이 남아있는 근대의 색동두루마기와 배열과 구성이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그림3,4)     그림 4)  오방색을 기준으로 배색한 복원품 2022년 해외 특별전시(카자흐스탄)모습       특히 명절에 입는 아이들의 옷에서 색동옷의 특징을 가장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색동과 함께 길한 글귀를 금박이나 자수로 새겨 넣은 화려한 모자를 함께 갖추어 입혀주었다.   그림 5)  전통 돌복 그림 6)  다양한 아동 모자 그림 7)  색동 마고자     그림 8)  돌복과 명절 모습 엘리자베스키스 작, 국립민속박물관소장     색동옷은 6세 이하의 어린이들이 주로 착용하였지만, 성인이 된 이후 색동옷을 입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날은 바로 본인 환갑에 착용했던 색동마고자와 굴레이다. 이 유물은 덕온공주의 손녀 윤백영 여사가 환갑을 맞은 아들에게 직접 지어 준 옷으로, 노래의(老萊衣)라고 불린다. 노래의는 중국의 고사(故事)에서 비롯된 것의 하나로 중국 초나라 선인 노래자(老萊子)가 늙은 부모를 즐겁게 해 드리려고 70살이 넘어서도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부린 일화를 말한다. 이를 본받아 우리나라에서도 자신이 환갑이 될 때까지 부모가 살아계시면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처럼 춤을 추어 부모를 기쁘게 하였는데, 이때 착용했던 옷이다. 이런 유물을 통해 부모의 마음은 자식이 환갑이 되어도 항상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것임을 느끼게 한다.(그림9, 10)     그림 9)  노래자해서(老萊子解書) 그림 10)  색동옷을 입은 모습     “유승목이가 회갑(回甲)인데 … 그의 어머니 윤백영이 81세로 생존한 고로 노래자(老萊子)의 채무반희(彩舞斑戱)하는 형식으로 굴레와 색등거리와 수(繡) 버선 입고 장난감 가지고 흔들고 놀고 허리띠 매고 주머니 차고 친족과 보는 사람들이 주머니에 돈 넣어 주었나이다.” 윤백영, 「노래자해서」 중 (1968)       이번 ‘이달의 유물’에서 소개한 조선시대 색동옷은 아이들의 외출복이자 명절옷으로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나쁜 기운을 막아주고자 했던 옛 어른들의 간절한 기원이 표현된 옷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에도 박물관에서는 이러한 전통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돌사진 촬영하기’ 체험프로그램을 통해 돌을 맞은 아이에게 색동한복을 입혀서 돌사진을 찍어주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림 11)  2025년 석주선기념박물관 체험프로그램 ‘돌사진 촬영하기’ 모습       참고자료 : 제37회 특별전 󰡔마음을 담아 지은 사랑 아이 옷󰡕 도록(2018)  

2026.02.04  0  87 

2026년 1월 : 책 표지에 담긴 멋, 능화판(菱花板)

     능화판은 책의 표지나 천에 문양을 찍어내거나 눌러 장식 효과를 내는 데 사용했던 목판(木板)이다. 주로 책 표지의 무늬를 장식할 때 사용되었다. 책을 실로 묶어 제본했던 전통적인 ‘선장(線裝)’ 방식에서 책 표지를 튼튼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방법이었다. 먼저 목판에 문양을 새겨 능화판이 완성되면 치자나 쪽물로 노랗게 물들인 표지를 능화판 위에 놓고 밀랍(蜜蠟)을 칠한 후, 밀돌로 문지르면 능화판의 요철에 눌려 표지에 무늬가 새겨졌다. 또한 여러 겹으로 배접된 표지가 압축되고 표지에 밀랍의 기름기가 올라와 기능 면에서도 더욱 견고한 표지가 완성되었다.    능화판은 고려시대부터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지나 실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후 조선시대를 거쳐 꾸준히 제작되다가 근대에 서양식 제본기술이 들어오면서 점차 사라졌다.    능화판의 형식과 문양의 종류는 다양하다. 목판에 새겨진 형식을 보면 목판의 한 면에만 새겨지거나 혹은 양면 모두 새겨졌다. 양면에 새겨진 경우는 모두 능화판 무늬가 새겨진 경우가 대부분이나 가끔 시전지판((詩箋紙板)이나 목판인쇄가 새겨진 것도 있다. 능화판은 목판 인쇄와는 달리 글자가 아닌 문양을 중심으로 제작되었으며, 종이 표면에 입체감을 부여해 시각적·촉각적 효과를 동시에 만들어냈다.     국화문 능화판 능화판 뒷면에 시전지판이 새겨진 모습    '능화(菱花)'란 마름꽃 무늬를 뜻하지만, 실제 능화판에는 마름꽃을 비롯해 연꽃, 국화, 모란, 당초문, 기하문 등 다양한 문양이 새겨졌다. 이러한 문양은 단순한 장식을 넘어 번영과 행복을 기원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박쥐오복·만자문 능화판, 71.7×25cm    박물관 소장 능화판은 박쥐와 만자문(卍字文)을 조합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운데 2개의 커다란 원 안에 1마리의 박쥐를 중심으로 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박쥐 4마리가 서로 연결되어 조각되어 있고 그 주변으로 만(卍)자문이 사방 연속으로 가득 차 있다.    조선시대에 박쥐 문양은 박쥐를 뜻하는 ‘복(蝠)’자가 복을 뜻하는 ‘복(福)’과 음이 같아, 다복과 길운을 기원하는 상징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다섯 마리의 박쥐는 수(壽)·부(富)·강녕(康寧)·유호덕(攸好德)·고종명(考終命), 즉 인생의 다섯 가지 큰 복인 ‘오복(五福)’을 의미한다.    함께 새겨진 만자문(卍字文)은 한자 만(卍)자를 가운데에 두고 끝을 직선으로 연결하여 또 다른 만자와 연속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만자문은 장수와 번영, 영원을 상징한다. 박쥐오복문과 만자문이 결합된 이 능화판은 단순한 장식을 넘어 오복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깃들어 있다.    다른 한 면에는 만자문만 연속적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이렇게 기하학적이면서도 단정한 문양을 반복적으로 새겨 넣은 것은 인쇄물에 격조와 미감을 더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능화판은 일상 속 책에도 아름다움을 더하고자 했던 전통 사회의 미의식과, 이를 구현한 장인의 정교한 손길을 전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박쥐오복·만자문 능화판의 뒷면 만자문 능화판 만자문 책표지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태우, 󰡔菱花板 硏究󰡕, 영남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1 󰡔박물관 신문󰡕 「조선시대 목판전-면과 선의 세계」, 2002

2026.01.05  0  425 

2025년 12월 : 조선의 방한모, 휘항(揮項) H

  휘항(揮項) 흑공단, 토끼털, 길이 62.5㎝, 아래 너비 60㎝      조선의 겨울은 유난히 길고 추웠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머리와 귀, 목을 동시에 보호할 수 있는 방한구를 발전시켰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이 휘항(揮項)입니다.    휘항은 조선시대 남성이 착용하던 방한용 쓰개로, 호항(護項)·풍령(風領)·휘양(揮場)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렸습니다. 휘항은 얼굴만 남기고 머리 뒤와 양쪽 귀, 그리고 목덜미 전체를 여유 있게 덮을 만큼 크고 넉넉한 형태이며, 앞쪽의 양옆에는 넓고 긴 끈이 달려있어 앞에서 단단히 여밀 수 있습니다. 외출 시 차가운 바람으로부터 신체를 효과적으로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휘항은 재질과 용도에 따라 다양하게 제작되었습니다. 겨울철에는 비단 겉감과 모피 안감을 갖춘 ‘털휘항[毛揮項]’이 상류층에서 주로 사용되었으며, 실용성과 경제성을 중시한 ‘무명휘항[木揮項]’은 면직물을 사용해 일상적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또한 환절기에는 얇은 사(紗)를 사용한 ‘양휘항(涼揮項)’ 등 계절에 따른 착용 편의를 고려한 다양한 형태가 나타났습니다.   흑립 아래 휘항을 착용하고 말을 타고 가는 선비 모습 – 출처: 심사정(1707~1769) <책건우려>, https://gongu.copyright.or.kr/gongu/wrt/wrt/view.do?wrtSn=13268352&menuNo=200018 책가도 중 휘항을 걸어 둔 모습 – 출처: 책가도 8폭 병풍(冊架圖八幅屛風), 국립민속박물관 소장품      우리 박물관 소장품인 이 휘항은 겉감은 검은색 계열의 비단(흑공단)을 사용하고 토끼털을 안감으로 사용해 전체에 대어 주었습니다. 전체 길이는 약 62.5cm, 하단 둘레는 약 60cm로 머리와 목뿐 아니라 어깨까지 충분히 덮는 크기입니다. 앞에 넓고 긴 끈을 달고 안쪽에는 가늘고 짧은 끈을 달아 충분히 여며지는 것은 물론이고 외형적인 위엄을 갖도록 해서 기능과 디자인을 모두 고려한 구성입니다. 또한 장식을 위해 앞뒤에 붉은색의 봉술을 끈목으로 연결했는데, 붉은색 봉술은 시각적 화려함을 더하는 요소로, 앞쪽에 9개, 뒤쪽에 7개를 배치하여 좌우 균형감과 위엄을 강조했습니다. 이 휘항은 조선 사대부의 위엄과 실용성을 모두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입니다.     휘항의 옆 모습- 앞뒤의 봉술이 끈목으로 연결된 모습   휘항 앞에 부착된 9봉술 장식      휘항은 정수리 부분이 비어 있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는데, 이는 겨울철에도 관모(흑립 등)를 반드시 착용해야 했던 조선의 관모 예제(禮制)를 준수하기 위한 설계로, 방한성과 예장(禮裝)을 동시에 확보한 형태입니다.     오늘날 남아 있는 휘항 유물은 많지 않지만, 남아 있는 몇 점의 실물은 조선 장인의 바느질 기법, 모피 안감의 풍성한 질감 등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줍니다. 휘항은 단순한 방한구를 넘어, 조선의 일상에서 실용과 미감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문화유산입니다.   < 참고문헌 > 전통문화포털 누리집 구글아트앤컬쳐 국립민속박물관 강순지·김은정(2008), 「문헌을 통해 본 조선시대 방한용 모 명칭에 관한 연구」, 『服飾』 58(7), 한국복식학회. 김성희(2007), 「조선시대 방한용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김창호·이미선·공수연 공저(2013), 『전통섬유와 복식공예』, 글누림. 안인실·이민정, 「휘항 재현품 제작을 위한 고증과 제작 방법 연구」, 『한국복식』 45,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2021.    

2025.12.03  0  585 

2025년 11월 : 애창가요명곡집 愛唱歌謠名曲集 H

  편 집_ 유석룡(柳錫龍) 발 행_ 윤은용(尹殷鏞) 발 행 일_ 1946.11.5. 등록번호_ S524371 청구기호_ 연민 781.63 유277ㄱ     1946년 발행된 󰡔애창가요명곡집󰡕은 「애국가」를 시작으로 「독립행진곡」, 「봉선화」, 「아리랑」, 「아리랑 낭낭」, 「오빠는 풍각쟁이」, 「목포의 눈물」, 「나는 열일곱 살이에요」, 「청춘야곡」 등 78곡이 수록되어 있다. 󰡔애창가요명곡집󰡕 표지 수록곡 목차     「독립행진곡」은 1946년 박태원이 작사하고 김성태가 작곡한 노래로 1946년 2월, 조선국민음악연구회가 편집하고 발행한 󰡔해방기념 애국가집󰡕에 처음 수록되었다. 평범한 장조 5음계의 행진곡으로 광복의 감격과 미래에 대한 밝은 전망과 실천의 독려를 담고 있다. 이른바 ‘해방가요’의 하나로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져 1990년대 중반까지 대학생에게 민중가요로 살아남았다.   「독립행진곡」 2~3절 가사   「아리랑」은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한 우리 민족의 노래로 여전히 애창되고 있으며, 2012년 12월 5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1894년 고종은 밤마다 광대들을 불러 새로운 노래 「아리랑타령」을 부르게 하였다고 하며, 이후 아리랑타령은 「Ararung」(1896), 「어르렁타령」(1912), 장안사의 「아리랑」(1918), 영화 「아리랑」(1926), 「신아리랑」(1930) 등으로 변용되어 전래되었다. 「봉선화」와 「아리랑」   일제강점기 아리랑 노래 가운데 선우일선의 「그리운 아리랑」, 「즐거운 아리랑」, 장일타홍의 「아리랑의 꿈」, 김선영의 「아리랑 세상」, 백난아의 「아리랑 낭낭」, 김용환의 「꼴망태 아리랑」, 이화자의 「아리랑 삼천리」, 백년설의 「아리랑 만주」, 김봉명의 「아리랑 술집」 등이 알려져 있다. 「아리랑 낭낭」 부분 「강남아리랑」 부분   이처럼 아리랑은 전통민요, 신민요, 대중가요, 가곡으로서 다양한 장르를 포괄하는 우리의 노래가 되었다. 󰡔애창가요명곡집󰡕에는 「아리랑」 이외에 1937년 처녀림(반야월, 박영호)이 작사하고 김교성(金敎聲)이 작곡한 「아리랑 낭낭」과 고일출(高一出)이 작사하고 나석기(羅奭基)가 작곡한 「강남아리랑」 등 신아리랑이 수록되어 있다.    󰡔애창가요명곡집󰡕에 수록된 노래들은 우리 민족의 애환과 희망을 담고 있다. 또 우리 민족 모두의 삶에 큰 힘이 되었고, 여전히 우리의 사랑을 받고 있다. 시대의 유행가는 누군가의 ‘애창곡’이 되었고, 음악이 국경과 언어를 초월해 인간애를 공감케 하는 힘이 있는 것처럼 지금 아리랑에서 출발한 우리의 노래는 세계가 공감하고 함께하는 K-Pop의 신기원을 열고 있다. 특별전 ‘한국 가곡을 들으셔’ 부분, 「중재 장충식 박사 어록」 특별전 ‘한국 가곡을 들으셔’ 부분, AI로 복원한 연주 영상   한편,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서는 음악의 힘을 느끼고 감상할 수 있는 ‘한국의 가곡을 들으셔’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 2025.9.26.(금)-12.19.(금), 오전 9시- 오후 4시(공휴일 휴관) : 석주선기념박물관 제2전시실 : 031-8005-2390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특별전 ‘한국 가곡을 들으셔’ 한편,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서는 음악의 힘을 느끼고 감상할 수 있는 ‘한국의 가곡을 들으셔’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2025.10.31  0  658 

2025년 10월 : 장옷 H

        장옷 두루마기 코트    장옷은 조선시대 여성의 포(袍) 중 대표적인 옷으로 길이가 길고 품이 큰 형태이다. 장옷은 한자로 장의(長衣) 또는 규의(袿衣)라고도 불렸으며, 언문으로 ‘댱옷’이라고 쓰였다. 여성의 장옷은 18세기 이전까지는 두루마기 또는 현대의 코트처럼 저고리와 치마를 위에 외투처럼 착용하였던 옷이었다. 18세기 이후에는 얼굴을 가리는 너울의 사용이 축소되면서 착용 외에도 머리에 쓰면서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 변화되었다.  장옷은 조선후기 풍속화에서도 자주 표현이 되는데, 녹색으로 된 긴 옷을 머리에 쓰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간혹 옷을 접어 머리에 이고 있는 그림도 보인다. 노인들은 장옷을 머리에 쓰기 불편하여 접어 머리에 이고 다니기도 하였다고 한다.     신윤복필 여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소장 김홍도 필 풍속도 화첩(점괘부분),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여성의 대표적인 외출용 겉옷인 장옷은 계절에 따라 소재를 달리하여 만들었다. 바람막이 코트, 트렌치코트, 울코트, 패딩코트와 같이 다양하게 현대에 착용하듯 조선시대에도 여름철에는 모시를 사용하여 홑옷으로 만들었으며, 봄과 가을에는 명주, 다양한 문양의 문단 등으로 겹옷, 겨울에는 솜을 넣어 솜장옷, 누비장옷을 만들어주었다.     겹장옷, 유인OO이씨 묘 출토, 1500년대 중후반 누비장옷, 문화유씨 묘 출토, 1615년~1685년  특히 조선 전기 문헌 기록을 살펴보면, 여성들이 장옷 위에 저고리나 당의 등의 짧은 옷을 겹쳐입는 문제를 제기하며 복요(服妖)를 금하는 상소문의 내용이 있어 남자의 장옷과 기존의 착용방식을 따르지 않은 유행을 확인해 볼 수가 있다.   “ 一, 禁服妖。 蓋衣裳之制, 所以別男女貴賤也, 非下民之所敢擅便者也。 今國中女子喜着長衣若男子然, 或以長衣着於衣裳之間, 成爲三層, 轉相慕效,  擧國皆然, 疑此卽史文所謂服妖者也。”   복요(服妖)를 금하는 것입니다. 대개 의상(衣裳)의 제도는 남녀(男女)와 귀천(貴賤)을  분별하려는 소이(所以)이니, 하민(下民)이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나라 안의 여자들이 장의(長衣) 입기를 즐겨 남자와 같이 하나,  그러나 장의를 의상(衣裳)의 사이에 입어 3층(層)을 이루게 하고 점점 서로 본따서  온 나라가 모두 그러하니, 의심컨대 이것은 곧 사문(史文)에  이른바 ‘복요(服妖)’라는 것입니다.    - 󰡔세조실록󰡕 3권, 세조 2년 3월 28일 정유 3번째 기사-   장옷 위에 짧은 단저고리를 입은 모습  또한 시대에 따라 옷의 크기와 형태도 변화되었는데, 품이 크면서 직선형의 형태에서 점차 품이 작아지면서 소매 등의 라인이 곡선형으로 표현되기도 하였다.       16세기 후반의 장옷, 유인OO이씨 묘 출토유물 17세기 후반의 장옷,  해평윤씨 묘 출토유물 19세기 전반기의 장옷, 덕온공주가 유물  특히 18세기 이후의 장옷은 착용과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옷을 여미는 깃의 모양과 고름의 이중적 특징이 나타는데, 홍색 고름은 착용했을 때 고름을 묶어주는 용도, 자주색 고름은 머리에 쓸 때 잡는 용도로 두 개를 부착하였으며, 고름의 위치를 대칭으로 만들어주었다. 두 개의 고름이 있는 장옷, 덕온공주가 유물 착용했을 때의 모습 머리에 씌었을 때의 모습  이번 이달의 유물에서 소개한 조선시대 여성의 장옷은 외출복으로서 방한 등의 실용성과 여성의 품위를 지키기 위한 겉옷으로서, 현대의 여성 코트와 마찬가지로 보온성과 단정한 외형을 갖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장옷과 코트 모두 시대는 다르지만, 신체 보호와 사회적 격식 유지라는 기능을 지니고 있으며, 복식의 미의식을 드러내는 겉옷 문화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2025.10.14  0  978 

2025년 9월 : 작호도(鵲虎圖) - 세계를 매료시킨 까치호랑이 H

세계를 매료시킨 까치호랑이- 작호도(鵲虎圖)   요즘 케이팝을 소재한 한 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의 열풍이 뜨겁다. 케데헌의 OST인 ‘골든’이 미국 빌보드 차트 ‘핫 100’에 2주째 1위에 올랐다고 한다. 우리 자신도 믿기 어려운 일들이 현실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데몬헌터스의 인기가 치솟으면서 작품 속에서 사자 보이즈의 정령으로 등장하는 호랑이와 까치의 인기도 덩달아 올라 호랑이와 까치 굿즈을 사려는 사람들로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오픈런이 생기고 굿즈 품절사태까지 벌어졌다고 한다.   케데헌에서 등장하는 호랑이와 까치는 우리의 전통 민화(民畵)인 작호도(鵲虎圖)에서 영감을 받아 만든 캐릭터이다. 흔히 ‘작호도’ 혹은 ‘호작도’라고 불리는 까치호랑이 그림은 우리의 대표적인 민화이다. 민화는 이름 없는 떠돌이 화가들이 그린 그림으로 선비들이 엄숙하게 자신들의 이상향을 그림 속에 녹여냈던 것과 달리 백성들의 재치와 해학, 익살스러움이 담겨 있다.   박물관에는 조선시대 ‘작호도’부터 현대적인 감각으로 그린 현대 ‘까치호랑이’ 그림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소장되어 있다.  작호도, 조선 후기(19세기), 51.3×108cm 작호도, 조선 후기(19세기), 57×105cm   작호도에서는 까치와 호랑이가 서로 짝을 이루며 등장한다. 까치는 소나무 위에서 호랑이 향해 지저귀고 있고 호랑이는 앞다리를 세우고 앉아 까치를 보거나 앞을 바라보는 모습이다.   까치는 예로부터 길조(吉鳥)로 여겨 ‘반가운 손님’과 ‘기쁜 소식’을 알리는 상징이었다. 호랑이는 우리 민족이 친근하게 여겨 온 동물로 잡귀를 물리치는 신령스러운 수호신이자 무섭고 위엄있는 존재이다. ‘호축삼재(虎逐三災)’라고 하여 호랑이는 화재(火災), 수재(水災), 풍재(風災) 등 재앙을 막아준다고 믿었다. 새해가 되면 용 그림과 함께 호랑이 그림을 벽에 붙여서 사악한 악귀를 물리치고자 했다. 호랑이와 까치가 주인공인 ‘작호도’에는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즐거운 소식만 가득하길 바라는 소망이 담겨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작호도에 보이는 호랑이는 백수(百獸)의 우두머리로 용맹스럽고 위엄이 있기보다는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한 어수룩한 모습이다. 작호도, 조선(19세기), 65.7×48cm   위의 그림에서 호랑이가 곰방대를 물고 있는 모습은 “아주 옛날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란 말을 떠올리게 한다. 호랑이를 의인화하여 표현한 것이다. 호랑이는 큰 눈을 게슴츠레 뜨고 바보스러운 표정과 어눌한 몸짓을 하고 있다. 호랑이의 상징인 날카로운 발톱은 숨겨져 보이지 않는다. 주위에는 구름에 반쯤 가린 해와 고귀함과 장수를 상징하는 학과 거북이가 배치되어 있다. 사물들의 인과관계와 원근법은 무시되고 있지만 오히려 자유로운 표현이 친근감을 준다.   작호도에 보이는 호랑이는 일반적으로 양반이나 권력자, 부패한 탐관오리를 상징하며 까치는 백성 즉 민초(民草)들을 상징한다. 호랑이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백성을 억압하는 양반관료나 탐관오리를 풍자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무서운 권력자도 사실은 웃음거리일 수 있다는 풍자, 그리고 일상에서의 두려움을 재치있게 풀어낸 것이다.   까치호랑이, 이영수 作,  위의 ‘까치호랑이’는 우리 대학 동양화과에 재직하셨던 이영수 명예교수의 작품이다. 교내에 산재해 있던 미술품들이 2024년에 박물관으로 이관되면서 박물관에서 소장하게 되었다. 이영수 화백은 민화를 수집하고 체계적으로 정리한 ‘한국민화전집’ 시리즈를 발간할 정도로 민화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가진 분이다. 평생 우리 민화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널리 알리고 대중화하는 작업을 하셨다. 이영수 화백의 ‘까치호랑이’는 오방색과 오간색을 사용한 강렬한 색감과 단순화된 선으로 까치와 호랑이를 더욱 세련된 현대적인 감각으로 구현하였다.   작호도는 단순히 재미있는 동물 그림을 넘어서 우리 조상들의 지혜와 유머, 그리고 삶의 바람을 담아낸 한국 민화이다. 까치가 전해주는 기쁜 소식과 호랑이의 익살스러운 표정을 통해, 옛사람들이 어떻게 두려움을 극복하고 웃음을 만들어냈는지를 느껴볼 수 있다. 전통 민화 속의 호랑이와 까치가 오늘날 매력있고 개성 넘치는 캐릭터로 재탄생하면서 까치와 호랑이는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 새로운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케데헌의 까치호랑이 열풍을 보며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는다.   <참고자료> 이영수 화백, "산수(傘壽) 앞둔 산수(山水)"와 "민화 대가“ https://www.kchannel.kr/news/articleView.html?idxno=62895 허균, 󰡔옛그림을 보는 법󰡕, 돌베개, 2013.    

2025.09.02  0  770 

2025년 8월 : 진주선 H

궁중의 섬세한 아름다움 – 진주선(眞珠扇)   진주선(眞珠扇)은 조선 시대 왕실 여성의 혼례 의식에 사용되었던 의례용 둥근 부채(團扇)입니다. 일상적인 부채와는 달리 진주선은 왕비, 세자빈, 공주 등의 궁중 여성의 혼례 시 얼굴을 가리는 용도로 사용했으며, 그 화려하고 정교한 외형은 왕실의 위엄과 품격을 상징합니다. 진주선(眞珠扇), 조선 후기(19세기), 28.5×47cm 진주선 뒷면    진주선 상·하단의 장식 우리 박물관 소장품인 이 진주선은 붉은색 비단에 모란무늬를 좌우 대칭으로 수놓아 부채 면 전체를 화려하게 장식하였습니다. 부채의 가장자리에는 동(銅)테가 둘러져 있으며, 중심에는 꽃무늬(花紋)를 음각한 동판이 부착되어 있습니다. 부채의 상·하단에는 꽃 모양의 동판이 부착되어 있는데, 상단에는 ‘男(남)’, 하단에는 ‘子(자)’ 글자가 음각되어 있어 다산을 기원하는 길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장식 동판에는 붉은색과 푸른색 원석이 감장(嵌裝) 기법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현종실록』(1662년) 기사에 따르면 국혼에 진주선을 사용할 당시, 그 제작 비용이 백금 1,000냥에 달해 백성들이 고통을 겪는 와중에 지나치게 사치스럽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선조로부터 내려온 관습이므로 폐지할 수 없다”고 하여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이후 궁중의 진주선을 본뜬 혼례선(婚扇)이 반가 및 민간에서도 사용되었으며, 이는 나무나 놋쇠 틀에 붉은 비단과 모란 수를 놓은 간소화된 형태였습니다. 우리 박물관에는 이러한 혼선으로 추정되는 부채도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 부채는 진주선과 유사하지만 재질과 문양 등에서 간소화된 혼례선으로 부채의 테두리는 나무로 제작되었으며 붉은 색의 선면에는 소소한 꽃무늬가 수놓아져 있습니다. 손잡이 끝에는 환고리가 달리고 딸기술 매듭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혼례선(婚扇), 조선 후기(18세기), 27×48cm 장식술길이 33cm 현존하는 진주선은 매우 희소하며, 국립고궁박물관 등의 몇몇 기관에 일부 소장되어 있습니다. 유물의 상태에 따라 진주가 퇴색하거나 탈락된 경우도 있지만, 원형이 유지된 진주선은 전통 복식과 공예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우리 박물관 소장 진주선은 조선 왕실의 예술성과 여성 문화를 섬세하게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로, 오늘날 장신구 디자인과 전통 공예 복원 분야에도 깊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장인의 정교한 기술, 궁중 여성의 품위, 그리고 한국인의 전통 미의식이 담긴 이 유물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아름다움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2025.08.05  0  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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