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유물
2026년 3월 : 말(馬) H
‘말’은 생생한 생동감, 뛰어난 순발력, 탄력 있는 근육, 미끈하고 탄탄한 체형, 기름진 모발, 각질의 말굽과 거친 숨소리를 가지고 있어 강인한 인상을 준다. 그리하여 바로 박력과 생동감의 이미지를 가진다. 말에 대한 표현은 시대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지만, 한국인의 관념 속에서 말은 신성함, 상서로움, 그리고 신이함을 상징하는 동물로서 인식되어 왔다. ‘말’은 12띠 중 일곱 번째 동물로서 60갑자 가운데 갑오(甲午, 靑, 木)-병오(丙午, 赤, 火)-무오(戊午, 黃, 土)-경오(庚午, 白, 金)-임오(壬午, 黑, 水)로 순행하며, 시(時)는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까지, 방위는 정남(正南)에 해당한다. 2026년, 병오년은 ‘붉은 말〔赤馬〕’의 해로 병오년에 태어난 사람들은 성품이 호방하고 개방적이며, 사람을 잘 사귀고, 저돌적·직설적이나 뒤끝은 없다고 한다. 또 지극한 양(陽) 가운데 음(陰)이 시작하는 ‘문명의 불’로서 어둠을 밝히고, 정신세계·교육·종교·예술·문화 등에 재능을 갖고 있으며, 육체적 활동보다는 정신적 활동에 유리하다고도 한다. 인류 역사상 ‘말’은 지금으로부터 6000여 년 전 중앙아시아에서 가축화가 이루어졌고, 5000년 전쯤에는 중동과 유럽으로 확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의 가축화는 단순한 동물 길들이기 차원을 넘어 인류의 사회 구조와 기술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제주도 정의현의 말 (「정의조점(㫌義操點)」 부분, 1702년, 국립제주박물관) 1702년(숙종 29)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형상은 41점의 탐라순력도를 남겼는데, 제주의 삼 읍을 점검하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장면을 그렸다. 그림은 정의현을 점검할 때 모습을 그린 「정의조점」에 표현된 제주 말의 모습이다. 한국 고대 건국신화에서 ‘말’은 부여 금와왕(金蛙王), 고구려 주몽, 신라 박혁거세 등이 탄생할 때 상서로움을 보여주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한 ‘말’은 땅과 하늘,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고 넘나들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하여 피장자의 영혼을 저세상으로 보내준다고 믿었다. 경주 구정리 방형분 말상(午像) 탁본 (신라,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경주 김유신묘 말상(午像) 탁본 (신라,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경주 흥덕왕릉 말상(午像) 탁본 (신라,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경주 경덕왕릉 말상(午像) 탁본 (신라,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한편, 삼국지「위서 동이전」에는 부여(夫餘)의 명마(名馬) 기록과 변(弁)・진한(辰韓) 사람들이 말을 탄다는 등의 관련 기록이 많다. 청동기시대 이후에는 말모양띠고리(마형대구) 장식을 몸에 지니고 다녔는데, 특히 원삼국시대 영남지역과 충청내륙을 중심으로 출토되는 지역적인 특수성을 보이고 있다. 말모양띠고리(馬形帶鉤) (경주 출토, 삼국시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청동제 허리띠의 맺음 부분으로 갈기가 과장되게 표현되었으며, 가슴에 긴 고리가 달려있다. 토제말 (傳 개경 출토, 고려시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토제 말의 머리 부분으로 사실적인 묘사가 돋보이며, 입 주변과 턱에 서기(瑞氣) 무늬를 새겨 상서로움을 표현하였다. 그릇 모양〔器形〕이나 동물을 본떠서 만든 토기, 즉 토우(土偶)나 토용(土俑)은 당시 사람들의 뛰어난 조형감각을 잘 나타내고 있다. 기마인물 토기나 오리형 토기 등이 대표적이지만 단독으로 표현된 말은 의물(儀物)로서 토용의 주요 대상 동물로 애용되었으며, 대체로 마구(馬具)를 갖춘 상태로 표현되었다. 신라의 기마인물형토기 (국보, 경주 금령총 출토, 국립중앙박물관, e뮤지엄) 가야의 기마인물형토기 (국보, 가야, 국립경주박물관,e뮤지엄) 토제 말(馬形土俑) (신라시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붉은 색을 띠는 토제 말로 머리와 목이 길고 갈기가 강조되었으며, 재갈과 안장 등 마구를 표현하고 있다. 토제말(馬形土俑) (부분, 신라시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토제말(馬形土俑) (부분, 신라시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이와 같은 고대의 토용은 장난감이나 애완용으로 만들어진 것, 주술적인 우상(偶像)으로서의 성격을 가진 것, 무덤에 넣기 위한 부장용(副葬用)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토용은 삼국시대의 신라·가야에서 출토 사례가 풍부하고 다채로운 면모를 가지고 있다. 고려시대의 경우 그 사례가 확연히 줄어들며, 조선시대에 이르면 죽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磁器)로 만들어 부장하는 명기(明器)의 제작이 두드러지는데, 인물·동물·생활용구 등을 많이 만들었다. 독립된 형태의 토용이건 장식용의 토우(土偶)이건 이들은 당시의 우주관(宇宙觀)이나 사생관(死生觀)을 해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외형상의 관찰만으로도 당시의 생활상·사회상을 짐작하게 하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 참고문헌> 국립민속박물관, 2025, 한국민속상진사전 말. 김중엽, 2021, 「원삼국시대 마형대구의 의미에 관한 고찰」, 마한백제문화 37.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1999, 새김예술-부처, 탑, 벗들.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2006, 搨影 名選 上.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뮤지엄(https://emuseum.go.kr/)
2026.02.27 0 1514
2026년 2월 : 색동옷 H
조선시대 색동으로 장식된 옷은 주로 돌부터 6세까지의 어린아이들이 주로 입었다. 색동은 저고리·마고자·두루마기·소품류 등을 장식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노랑·초록·파랑·빨강 등 다양한 색을 화려하게 사용하였다. 옛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새로 옷을 지어 입히면서 색이나 문양 등을 통해 아이의 건강과 미래를 축원하여 주었다. 특히 음양오행(陰陽五行)에 따른 오방색(五方色)을 넣어 지은 색동옷에 호환 마마와 같은 액운을 물리치는 벽사(辟邪)와 무병장수의 의미를 담았다. 오방색은 동서남북 방위와 계절 등 자연과 인간이 서로 대립하고, 조화를 설명하는 음양오행설에 기초로 맞춰 청색과 적색, 백색, 흑색, 황색의 색이 전해주는 에너지를 의미하고 있다. 이러한 색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오방색 주머니가 석주선기념박물관에 다수 소장되어 있다. 조선의 마지막 공주인 순조의 막내딸 덕온공주(德溫公主: 1822~1844) 집안의 유물에서 옷 외에 소품들도 함께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림 1) 오방색 주머니 그림 2) 오색실타래 위의 유물은 오방색 주머니(그림1)와 돌잡이 물품인 오색실타래(그림2)이다. 주머니는 각각 동서남북 방위에 맞춰 비단을 배열하고 중앙에는 사각형의 황색 비단을 대어 만들었으며, 오색실타래는 긴 실을 오방색과 간색(間色)으로 염색한 뒤 타래를 틀어 묶어 화려하게 꾸며주었다. 오행을 갖추어 나쁜 기운을 막으며, 긴 실처럼 돌을 맞은 아이가 장수하기를 바란 것이다. 그림 ) 해평윤씨 묘 출토 중치막과 색동 두루마기 그림 3) 해평윤씨 묘 출토 중치막과 색동 두루마기 2001년 11월 14일, 경기도 양주시에 있는 해평윤씨 집안의 한 무덤에서 17세기 중반으로 추정되는 여섯 살 소년의 미라가 발견되었다. 출토 당시, 소년 미라가 입고 있던 옷에 깃· 소매·무·섶을 몸판과 다른 색상으로 만들어 준 중치막(조선시대 남자들이 흔히 입었던 외출복)을 보면, 색상이 남아있는 근대의 색동두루마기와 배열과 구성이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그림3,4) 그림 4) 오방색을 기준으로 배색한 복원품 2022년 해외 특별전시(카자흐스탄)모습 특히 명절에 입는 아이들의 옷에서 색동옷의 특징을 가장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색동과 함께 길한 글귀를 금박이나 자수로 새겨 넣은 화려한 모자를 함께 갖추어 입혀주었다. 그림 5) 전통 돌복 그림 6) 다양한 아동 모자 그림 7) 색동 마고자 그림 8) 돌복과 명절 모습 엘리자베스키스 작, 국립민속박물관소장 색동옷은 6세 이하의 어린이들이 주로 착용하였지만, 성인이 된 이후 색동옷을 입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날은 바로 본인 환갑에 착용했던 색동마고자와 굴레이다. 이 유물은 덕온공주의 손녀 윤백영 여사가 환갑을 맞은 아들에게 직접 지어 준 옷으로, 노래의(老萊衣)라고 불린다. 노래의는 중국의 고사(故事)에서 비롯된 것의 하나로 중국 초나라 선인 노래자(老萊子)가 늙은 부모를 즐겁게 해 드리려고 70살이 넘어서도 색동옷을 입고 재롱을 부린 일화를 말한다. 이를 본받아 우리나라에서도 자신이 환갑이 될 때까지 부모가 살아계시면 색동옷을 입고 어린아이처럼 춤을 추어 부모를 기쁘게 하였는데, 이때 착용했던 옷이다. 이런 유물을 통해 부모의 마음은 자식이 환갑이 되어도 항상 어린아이처럼 보이는 것임을 느끼게 한다.(그림9, 10) 그림 9) 노래자해서(老萊子解書) 그림 10) 색동옷을 입은 모습 “유승목이가 회갑(回甲)인데 … 그의 어머니 윤백영이 81세로 생존한 고로 노래자(老萊子)의 채무반희(彩舞斑戱)하는 형식으로 굴레와 색등거리와 수(繡) 버선 입고 장난감 가지고 흔들고 놀고 허리띠 매고 주머니 차고 친족과 보는 사람들이 주머니에 돈 넣어 주었나이다.” 윤백영, 「노래자해서」 중 (1968) 이번 ‘이달의 유물’에서 소개한 조선시대 색동옷은 아이들의 외출복이자 명절옷으로 무병장수를 기원하고 나쁜 기운을 막아주고자 했던 옛 어른들의 간절한 기원이 표현된 옷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에도 박물관에서는 이러한 전통을 이어가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돌사진 촬영하기’ 체험프로그램을 통해 돌을 맞은 아이에게 색동한복을 입혀서 돌사진을 찍어주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그림 11) 2025년 석주선기념박물관 체험프로그램 ‘돌사진 촬영하기’ 모습 참고자료 : 제37회 특별전 마음을 담아 지은 사랑 아이 옷 도록(2018)
2026.02.04 0 2322
2023년 10월 : 미사일록(美槎日錄) : 주미공사의 외교일기 H
이범진(李範晉, 1852~1911) 저, 이건호 수기(手記) 필사본(筆寫本), 1책(59면), 포배장(包背裝) 가로 23.0cm, 세로 28.5cm 1911년 1월 26일(러시아력 1월 13일) 정오 무렵,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교외에서 세 발의 총성이 울렸습니다. 초대 주러공사로 러시아에서 국권회복운동을 주도했던 이범진은 1910년 한일합방을 소식을 들은 후 망국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머나먼 이국 땅에서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범진 이범진과 이기종(우), 김규식(좌) 그는 고종에게 “우리나라 대한제국은 망했습니다. … 국권을 회복할 방책이 없다면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자결 외에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라고 탄식하는 유서를 남겼습니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된 후에도 이범진은 일본의 송환요구를 거부하며 러시아에서 계속 항일운동을 펼쳐나갔습니다. 고종의 헤이그 밀사 파견 때에는 이준, 이상설과 함께 고종의 친서를 작성하고 아들인 이위종을 통역 및 일원으로 참여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러시아에서의 활동상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는 반면 이범진이 9대 주미공사로서 미국에서 행한 외교 활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이범진의 주미공사 시절 활동을 기록한 일기가 바로 우리 대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미사일록’입니다. 미사일록 표지 미사일록은 이범진이 고종에게 주차미국특명전권공사(駐箚美國特命全權公使)로 임명된 1896년(고종 33) 6월 20일부터 이듬해인 1897년(고종 34) 1월 31일까지의 기록입니다. 이범진은 주미공사로 임명된 후 인천을 출발해 미국 워싱턴에 도착하기까지의 구체적인 여정과 미국에서 외교관으로서 5차례 걸쳐 미 대통령을 접견하고 미국의 우정장관과 탁지대신을 만나는 등 미국 정치인과 활발한 외교활동을 벌인 내용 등을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주미공사관 외관(1893) 미사일록에는 이범진이 워싱턴으로 향하는 배 안에서 남녀가 부둥켜안고 춤추는 장면을 보고 놀라는 모습, 미국의 발달한 선진문명에 감탄하는 모습, 다른 나라 공사관의 초대를 받고 초대를 받으면 답례로 초대를 하는 것이 관례인데 조국의 가난한 경제 사정으로 초대를 할 수 없는 상황을 한탄하는 모습 등이 기록되어 있어서 약소국 외교관으로 느꼈던 문화적 충격과 비애를 생생하게 전달해 줍니다. 후반부 실려 있는 부록에는 1897년 1월 21일 미 대통령 관저에서 열린 연회 때의 좌석 배치도가 첨부되어 있어서 흥미롭습니다. 배치도에는 우측 하단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미대통령, 미대통령 부인, 미국무장관. 각국대사 등 착석자의 이름을 기록하여 이날 참석했던 66인의 명단과 좌석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사일록 부록 연회배치도(32, 33면) 또한 단어와 일상 대화를 영어, 한자, 한글 순으로 표기해 놓았는데 예를 들면 와츠 時票 쳬인 時票絲 토박고 담배, 유어 汝처럼 영어 발음을 먼저 적고 이에 해당하는 한자나 우리말을 병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아타쉬 attache 書記生, 식글트리 secretary 參事官, 민의시터 minister 公使 등 업무와 관련한 단어도 기록하였습니다. 단어 외에 간단한 영어 회화도 있어서 일종의 영어 연습장이었던 걸로 추측됩니다. 미사일록 부록(38, 39면) 이범진은 미국 역대 대통령선거사상 가장 치열했던 1896년 선거를 직접 경험하고 당시의 정치 쟁점에 대해 기록하였으며 미국의 의회제도와 다수결 원칙 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기록하여 당시 조선 외교가의 미국인식을 알 수 있게 합니다. 미사일록은 수침으로 인한 번짐과 말림, 구겨짐이 심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국가기록원의 2022년 맞춤형 복원·복제 지원서비스 사업에 선정되어 1여 년의 복원작업으로 보존상태가 많이 개선되었습니다. 복원 전 복원 후 사진 국가기록원 제공 박물관에서는 미사일록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국가등록문화재 지정신청 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문화재청은 미사일록이 주미공사의 외교상황, 당시 영어 사용 용례 및 표기, 19세기 말 지식인으로서 서양 국가에 대한 인식수준 등 다양한 역사적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임을 인정하여 지난 8월 10일 미사일록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예고하였습니다. 미사일록의 등록문화재지정예고 보도 (2023.8.10.연합뉴스) < 참고문헌 > 김문식, 연민문고 東裝貴重本 해제집, 문예원, 2012. 김철웅, 미사일록, 푸른역사, 2022
2023.10.04 0 2426
2023년 11월 : 골패와 골패주머니 H
시 대 : 1850년대 주머니 : 가로 16㎝, 세로 19㎝ 골 패 : 가로 1.4㎝, 세로 2.1㎝ 이 유물은 조선 후기에 성행했던 전통 놀이의 하나인 골패놀이를 위한 골패와 골패를 담아 보관하던 주머니입니다. 현재 29개의 골패가 주머니에 담겨 있는데 골패는 흑각 위에 상아를 덧붙여 만들었습니다. 골패주머니는 흑항라(黑亢羅)로 된 겉감에 안감으로 작은 꽃무늬가 프린트된 면직물을 사용해 만들었습니다. 보통의 주머니는 겉감과 안감의 안쪽을 마주대고 만들어서 안쪽에는 안감의 겉이 보이는 것과는 달리 얇고 투과성이 좋은 흑항라에 안감을 겉에서 보이도록 사용해 꽃무늬가 비춰 보이게 만든 소박하고 아름다운 주머니입니다. 골패 일반적으로 골패는 납작한 직사각형의 나무 위에 상아(象牙)나 동물 뼈 등을 덧붙여 만드는데 재료에 따라 강패(江牌)·아패(牙牌)·호패(號牌)라고 부릅니다. 각 패는 크고 작은 구멍을 새긴 후 그 위에 검은색이나 붉은색을 칠해 만드는데 모두 32개의 쪽으로 구성됩니다. 전통 놀이의 하나인 골패놀이는 놀이인 동시에 성인 남자들이 주로 하던 노름의 일종으로 조선 후기에 투전(鬪牋), 쌍륙(雙六) 등과 함께 성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중국 송(宋)나라 때 처음 만들어져, 우리나라에는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사들에 의해 전해졌다는 설과 조선 후기 청나라로부터 전해졌다는 설이 있으나 어느 쪽도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골패주머니 이런 골패놀이는 지역에 따라 매우 다양해서 약 80가지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는데 보통은 둘 또는 네 명이 모여서 모두 227점을 만드는 놀이입니다. 우리나라에서의 골패놀이에 대한 설명은 많이 남아 있지 않은데 최남선은 「풍속편·골패원류(骨牌源流)」에서 골패의 내력과 놀이 방법에 대해 “숫자를 기록한 물건을 던져서 우열을 가리는 유희의 하나이나 주사위를 쌍으로 연결하여 우열을 가리는 특징을 가진다”라고 쓰고 있습니다. 골패놀이 방법은 갖가지로 변용이 가능했으며 지역에 따라서 그 방법이 약 80가지에 이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골패주머니의 내부 가야금 병창으로 불렀던 골패타령은 골패의 별칭들과 골패를 가지고 노는 방법에 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패(牌)에 대해 그림을 덧붙여 놀이방법을 설명한 도설서인 골패격도(骨牌格圖)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나무로 만든 골패와 골패통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제9부 형전(刑典) 육조(六條) 제5장 금포(禁暴)에는 “요즈음 유행하고 있는 도박은 바둑, 장기, 쌍륙(雙陸), 투패(鬪牌, 馬弔, 투전), 강패(江牌, 骨牌), 척사(擲柶)이다”라면서 “여러 도박 중에서 마음을 망가뜨리고 재산을 탕진하여 부모와 종족의 걱정거리가 되는 것은 마조(투전)가 첫째이고 쌍륙 · 강패가 그 다음이다.”라고 하여 골패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하였습니다. 골패와 종이로 만든 골패 상자 이 유물 외에도 나무로 만든 골패가 원형의 목재 통에 보관된 것과 종이로 만든 상자에 담겨 있는 등 다양한 형태의 것들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유물들은 당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즐겼던 놀이었던 것을 짐작게 합니다. 기산풍속도첩 ‘狹娼遊賭(기녀와 골패놀이 하는 모습)’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참고문헌 백진우, 2018, 「골패를 노는 방법, 골패격도(骨牌格圖)」, 고전과 해석, vol.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4193) 국립민속박물관
2023.11.01 0 1486
2022년 9월 : 색동두루마기 H
색동두루마기, 1947년 색동두루마기는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온공주(1822~1844)의 손녀인 윤백영(1888~1986)여사가 손자의 돌을 맞아 손수 지은 어린이용 두루마기입니다. 어른의 두루마기와 형태는 같지만 소매부분을 오방색 등의 다채로운 옷감을 이용하여 색동으로 만든 것이 특징입니다. 알록달록 때깔을 입혔다고 해 ‘때때옷’이라고도 하고, 섣달 그믐날인 ‘까치설날’에 입기 시작한다고 해 ‘까치두루마기’, 소매와 몸판을 오방색 등으로 배색해서 ‘오방장두루마기’라고도 불렸습니다. 까치두루마기,1937년 호건, 1950년 호건은 주로 상류층 남자아이가 복건 대신에 사용한 모자로 명절에 주로 착용하였습니다. 잡귀를 쫓기 위해, 좌우에 귀를 달고 눈썹, 눈, 코, 입, 수염 등을 수놓아 호랑이의 용맹스런 형상을 나타내주었습니다. 양쪽의 끈과 모자의 가장자리는 아이가 훌륭한 인품을 지니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염원을 담은 덕담을 금박으로 장식하기도 하였습니다. 색동두루마기와 전복을 입고, 복건을 쓴 모습 오방색 주머니, 1890년 오방색 주머니는 덕온공주 집안에서 전해진 유물입니다. 청색과 적색, 백색, 흑색의 비단을 각각 동서남북 방위에 맞춰 배열하고, 중앙을 의미하는 황색을 장식하여 나쁜 기운을 막고자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통 아이옷에는 부모와 어른들의 염려와 기대를 담아 전하는 ‘마음을 담아 지은 사랑’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습니다.
2022.09.06 0 2379
2023년 2월 : 평삼홉(平三合), 고오홉(高五合) 명문 홉 H
길이, 부피, 무게를 재는 기구 또는 단위를 총칭해서 도량형(度量衡)이라고 합니다. 길이를 재는 자는 도(度), 부피를 재는 되와 말, 홉은 량(量), 무게를 재는 저울과 저울추는 형(衡)에 해당합니다. 이들 도량형기들은 오랜 기간 인류와 함께 해 온 삶의 동반자였습니다. 일찍이 조선시대 실학자인 유형원은 반계수록(磻溪隧錄)에서 “도량형은 누구나 항상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장단(長短)이 있어서는 안되며 일정하게 된 후에는 거짓됨이 끼어들지 못하여 천하(天下)가 균평(均平)하여 진다”고 하였습니다. 통일된 도량형의 기준 제시와 유지는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안정과 질서를 가져다 준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달의 유물인 ‘명문 홉’은 작은 분량의 부피를 잴 때 사용했던 용기입니다. 통나무의 속을 파서 손잡이까지 일체형으로 만든 홉으로 한쪽에는 길쭉한 원통형 손잡이가 달려 있습니다. 전체적인 크기는 18×7×5.5cm이며 손잡이에는 지름 1.5cm의 구멍이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한 면에는 ‘高五合’ 다른 한 면에는 ‘平三合’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고봉으로 할 때는 5홉, 평목(平木)으로 평평하게 깎으면 3홉이라는 의미입니다. 평목(平木)으로 평평하게 깎은 모습 ‘평삽홉(平三合)’ 명문 고봉으로 올린 모습 ‘고오홉(高五合)’ 명문 홉은 한 줌의 양으로, ‘합한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홉은 되의 10분의 1을 나타내는 단위로 10작(勺)이며 약 180ml 정도입니다. 주로 조, 깨 등 조그마한 곡물을 재는 데 사용했습니다. 10홉이면 1되[升], 10되면 1말[斗], 10말이면 1곡(斛)입니다. 반홉(5작)과 1홉 다양한 형태의 되 명문 되(盖井洞 李監察宅) 원통형 말 우리 박물관에는 약 800여 점에 달하는 많은 도량형기들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전국을 조사하고 발굴하면서 시골 농가에서 수집한 것들로 우리 박물관의 꾸준한 유물 수집의 노력이 담겨져 있습니다. 박물관 소장 다양한 도량형기들
2023.02.01 0 989
2026년 1월 : 책 표지에 담긴 멋, 능화판(菱花板) H
능화판은 책의 표지나 천에 문양을 찍어내거나 눌러 장식 효과를 내는 데 사용했던 목판(木板)이다. 주로 책 표지의 무늬를 장식할 때 사용되었다. 책을 실로 묶어 제본했던 전통적인 ‘선장(線裝)’ 방식에서 책 표지를 튼튼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방법이었다. 먼저 목판에 문양을 새겨 능화판이 완성되면 치자나 쪽물로 노랗게 물들인 표지를 능화판 위에 놓고 밀랍(蜜蠟)을 칠한 후, 밀돌로 문지르면 능화판의 요철에 눌려 표지에 무늬가 새겨졌다. 또한 여러 겹으로 배접된 표지가 압축되고 표지에 밀랍의 기름기가 올라와 기능 면에서도 더욱 견고한 표지가 완성되었다. 능화판은 고려시대부터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지나 실물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이후 조선시대를 거쳐 꾸준히 제작되다가 근대에 서양식 제본기술이 들어오면서 점차 사라졌다. 능화판의 형식과 문양의 종류는 다양하다. 목판에 새겨진 형식을 보면 목판의 한 면에만 새겨지거나 혹은 양면 모두 새겨졌다. 양면에 새겨진 경우는 모두 능화판 무늬가 새겨진 경우가 대부분이나 가끔 시전지판((詩箋紙板)이나 목판인쇄가 새겨진 것도 있다. 능화판은 목판 인쇄와는 달리 글자가 아닌 문양을 중심으로 제작되었으며, 종이 표면에 입체감을 부여해 시각적·촉각적 효과를 동시에 만들어냈다. 국화문 능화판 능화판 뒷면에 시전지판이 새겨진 모습 '능화(菱花)'란 마름꽃 무늬를 뜻하지만, 실제 능화판에는 마름꽃을 비롯해 연꽃, 국화, 모란, 당초문, 기하문 등 다양한 문양이 새겨졌다. 이러한 문양은 단순한 장식을 넘어 번영과 행복을 기원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박쥐오복·만자문 능화판, 71.7×25cm 박물관 소장 능화판은 박쥐와 만자문(卍字文)을 조합한 문양이 새겨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운데 2개의 커다란 원 안에 1마리의 박쥐를 중심으로 날개를 활짝 펴고 있는 박쥐 4마리가 서로 연결되어 조각되어 있고 그 주변으로 만(卍)자문이 사방 연속으로 가득 차 있다. 조선시대에 박쥐 문양은 박쥐를 뜻하는 ‘복(蝠)’자가 복을 뜻하는 ‘복(福)’과 음이 같아, 다복과 길운을 기원하는 상징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다섯 마리의 박쥐는 수(壽)·부(富)·강녕(康寧)·유호덕(攸好德)·고종명(考終命), 즉 인생의 다섯 가지 큰 복인 ‘오복(五福)’을 의미한다. 함께 새겨진 만자문(卍字文)은 한자 만(卍)자를 가운데에 두고 끝을 직선으로 연결하여 또 다른 만자와 연속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끝없이 이어지는 만자문은 장수와 번영, 영원을 상징한다. 박쥐오복문과 만자문이 결합된 이 능화판은 단순한 장식을 넘어 오복이 영원하기를 바라는 염원이 깃들어 있다. 다른 한 면에는 만자문만 연속적으로 조각되어 있는데 이렇게 기하학적이면서도 단정한 문양을 반복적으로 새겨 넣은 것은 인쇄물에 격조와 미감을 더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능화판은 일상 속 책에도 아름다움을 더하고자 했던 전통 사회의 미의식과, 이를 구현한 장인의 정교한 손길을 전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박쥐오복·만자문 능화판의 뒷면 만자문 능화판 만자문 책표지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태우, 菱花板 硏究, 영남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1 박물관 신문 「조선시대 목판전-면과 선의 세계」, 2002
2026.01.05 0 2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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