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유물
2025년 5월 : 벼루(조희룡 소장연) H
벼루는 글씨를 쓰기 위한 문방도구로서 붓, 먹, 종이와 함께 문방사우(文房四友)라고 불리며 선비의 삶과 학문를 상징해 왔습니다. 벼루를 한자로는 ‘연(硯)’이라고 하는데 간다는 의미에서 ‘연(硏)’이라고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먹을 가는 바닥 부분인 연당(硯堂), 갈아 낸 먹물이 모이는 오목하게 파진 물집인 연지(硯池)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중국에서 전래되어 삼국시대부터 벼루를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삼국시대의 출토된 벼루들은 여러 개의 다리를 가진 둥근 모양의 원형 벼루들이 대부분입니다. 신라 벼루로는 우리 박물관이 경주 인왕동에서 수습한 도제(陶製) 벼루가 있습니다. 박물관이 경주 인왕동에서 수습한 신라 벼루는 원형에 동물 다리 형태의 다리가 4개 붙어 있어서 원형수족연(圓形獸足硏)이라고 합니다. 둥근 연당부분에 파손 흔적이 있지만 그 주위로 골을 파서 먹물이 모아지게 만들고 주위의 막음까지 있는 완전한 형태로 유약도 발라져 있어 신라 벼루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경주 인왕동 수습 신라벼루 풍류를 즐기는 우리 옛 조상들은 벼루를 단지 먹을 가는 도구라고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연당과 연지 둘레에 각종 아름다운 조각을 새겨 넣어 한껏 멋을 내고 감상의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명연(名硯)으로 불리는 벼루에는 화조, 산수, 소나무 등이 조각되어 있어서 벼루의 품위를 한껏 높여 줍니다. 뒷면에는 명문장가와 명필이 모여 연명(硯銘)을 새겨 넣고 벼루 자체에 이름을 붙여 주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벼루에 새겨진 조각은 미술품으로서의 품격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였으며 아무리 석질이 좋다 하더라도 조각이 서투르면 벼루의 가치가 떨어진 것으로 여겼습니다. 조선시대 인물 중에 벼루에 각별한 애정을 가진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우봉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이 있습니다. 조희룡은 시, 글씨, 그림에 모두 뛰어났으며 매화 그림을 많이 그린 사람으로도 유명합니다. 그는 문방사우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는데 특히 벼루에 대해서는 벽(癖)이 있다고 할 정도로 온갖 벼루를 사 모았던 ‘벼루 마니아’였습니다. 전국의 명석(名石)을 찾아다니며 벼루를 수집했던 조희룡은 벼루 102개가 모이자 자신의 집을 “백이연전전려(百二硯田田廬)”즉 ‘102개의 벼루 밭이 있는 시골집’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우리 박물관에는 약 700여 점의 벼루를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우봉 조희룡이 생전에 소장했던 벼루도 있습니다. 조희룡 소장연은 짙은 자줏빛의 고산석(高山石)으로 만들어졌으며 모를 약간 둥글게 깎은 사각 모양으로 둥근 연당과 양 끝이 아래로 구부러진 타원형의 연지를 갖고 있습니다. 고산석은 조선 후기 문인이 선호했던 고급 벼루 재질로, 먹이 잘 갈리고 윤기 있는 표면과 깊이 있는 색조를 갖춘 것이 특징입니다. 조희룡 소장벼루 (앞면) 연당과 연지 주위로는 학, 매화, 산, 거북이, 사슴 등의 십장생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뒷면에는 행함과 실천을 강조한 “讀得一尺不如行得一寸(1척만큼 읽는 것이 1촌만큼 행하는 것만 못하다)”는 문장과 그의 호인 우봉(又峰)이라는 글자가 인장 형태로 새겨져 있어서 우봉 조희룡이 소장했던 벼루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조희룡 소장벼루 (뒷면) 벼루에 미쳤다고 할 정도로 벼루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가진 조희룡의 벼루라는 점에서 남다른 풍류를 느끼게 합니다. 연당에는 먹을 갈아 생긴 패임이 있으며 가장자리의 닳은 부분, 표면의 마모 등 실제 사용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이 벼루는 조희룡이 실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은 유물로, 문인의 손때와 정신이 깃든 창작 도구의 가치를 지닙니다. 또한 각자(刻字)된 문구와 조형미를 통해 조선후기 문인 사회의 미의식과 실천 윤리를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벼루는 단순한 필기도구를 넘어, 선비들의 사유와 취향, 예술 세계를 구현한 복합적인 문화재입니다. 조희룡의 고산석 벼루는 그러한 상징성과 정신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조선 시대 벼루 제작기술과 그리고 문인들의 생활문화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로 평가됩니다.
2025.05.02 0 234692
2025년 6월 : 궁중여인의 여름용 당의唐衣 H
더위가 시작되는 6월입니다. 석주선기념박물관 ‘이달의 유물’에서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여인들이 여름이 되면 착용하는 당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당의는 조선시대 여성 소례복의 대표적인 옷으로 궁중과 사대부가 여성들의 위계와 품격, 그리고 예법을 상징하는 복식입니다. 저고리 위에 덧입는 옷으로, 기본 구조는 저고리와 유사하나, 세 자락이 길고 양옆의 곡선과 트임이 있는 것이 특징이며, 격식을 갖춘 외출복 또는 예복으로 착용되었습니다. 궁중에서는 예식이나 문안 인사 시, 명절의 예복으로 민간에서는 궁에 입궐할 때나 혼례복 등으로 착용하였고, 신분에 따라 장식 등에서 차이를 두었습니다. 덕온공주의 금박 당의 1837년 덕온공주 혼례 시 항아(궁녀)당의 1837년 순정효황후와 궁녀들의 모습(당의 장식의 차이를 확인해 볼 수 있다.) 당의의 유래에는 여러 견해가 있으나, 현재까지 가장 설득력 있는 기원은 조선 전기 장저고리의 형태에서 점차 변화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1500년대부터 1900년대까지의 여성의 긴 저고리와 당의의 유물들을 연대별로 변화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옆트임 구조와 좌임으로 여미는 방식에서 당의와 동일한 구조를 보이며, 크기와 품만 다를 뿐 기본 형식은 동일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직금당저고리 1500년대 광해군비 당의 1600년대 당의 1700년대 당의 1900년대 조선시대 문헌에 기록된 당의의 명칭은 ‘저고리’, ‘당저고리’, ‘당고의’, ‘당의복’, ‘당한삼’, ‘당의’ 등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왕비, 세자빈은 ‘당고의’, 군부인, 옹주는 ‘당저고리’ 등 이처럼 같은 옷이라도 신분에 따라 불리는 명칭이 달랐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당의의 기본 색상은 겉감은 녹색, 안감은 홍색을 사용하였으며, 한 겹으로 만들 때는 녹색계열의 옷감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외 동지 명절에는 팥죽색의 자주색으로 당의를 만들어 입기도 하였습니다. 겹당의(1800년대) 홑당의(1900년대) 동지날 착용한 자적당의 (1836년) 곧 다가오는 여름철, 조선시대의 여인들은 어떤 당의를 착용하고 더위를 이겨냈을까요? 조선시대 궁중 비빈(妃嬪)들의 사계절 의복을 기록해 둔 『사절복색자장요람』에서 보면, 여름을 앞둔 4월에 진상된 의복이거나 여름철인 5~8월에 착용되는 의복으로 바람이 잘 통하는 얇은 옷감(사직물, 광사)로 만든 당한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월 단오 초록광사 깍근 당한삼․ 사웃치마․ 옥치환…… 오월 초십일 백광사 당한삼…" (『사절복색자장요람』 中) 『사절복색자장요람』, 숙명여자대학교박물관 소장 특히 더운 여름을 맞기 전의 계절, 일년 중에서 가장 양기가 왕성한 날인 한국의 명절 단오(端午)에 “깍은 당한삼”이라고 불리는 당의를 착용해주는데, '깍은 당한삼'과 일반당의와의 차이점은 아랫면의 뾰족한 양쪽 모서리가 바깥으로 뻗어진 곡선형이 아닌 두 귀가 안쪽으로 말아 들어가 둥글게 모양을 내는 형태로 일반당의와 다른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깍은”이라는 용어는 ‘솔기(또는 시접)가 깎은 듯이 가늘다’라는 의미의 “깍기(또는 깎기)”로 얇게 말아준 것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명칭의 당의와 관련된 유물이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현재 진행하고 있는 박물관특별전 ‘당의랩소디“에서 선보이고 있습니다. 금박 당의, 1837년 깍은 당한삼, 1800년대 일반 당의의 아랫면, 1837년 깍은 당한삼의 아랫면, 1800년대
2025.06.03 0 724
2022년 10월 : 안중근유묵(보물 569-21호) H
의거 직후 안중근 의사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제공) 안중근 의사의 손바닥 도장 안중근 의사(1879~1910)는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우리나라를 침략하려던 일본의 원수(元首) 이토 히로부미를 권총으로 저격 사살하여 한민족의 자존심을 드높인 인물입니다. 의거 직후 안의사는 러시아 공안에 체포되어 만주 여순감옥에서 일본인들에게 재판을 받고 1910년 3월 순국하였습니다. 우리 박물관이 소장한 안중근 유묵은 안의사가 만주 여순감옥에 갇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직전, 일본인 전의(典醫) 오리타 도쿠(折田督)에게 써준 글씨입니다. 광복 이후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조카인 오리타 간지(典田幹二)가 1989년 2월 20일 우리 대학에 기증하였습니다. 그 후 1991년 7월 12일 보물 제569-2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기증자(가운데)와 안중근 유묵 동아일보 1989년 2월 22일 기사 안중근 유묵은 2행 16자로 안의사의 심오한 동양 평화 정신과 일본의 침략 정책을 비판하고 경각심을 일깨우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欲保東洋 先改政略 時過失機 追悔何及” 동양을 보존하려면 먼저 정략을 바꾸어야 한다. 때가 지나고 기회를 놓치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안중근 의사는 1909년 동지 11명과 조국의 독립의 기원하며 손가락을 잘라 ‘대한독립’이라고 혈서를 쓰는 단지동맹(斷指同盟)을 결의를 했습니다. 이러한 단지동맹으로 안의사의 왼쪽 손가락 약지는 한 마디가 잘려져 있습니다. 안의사는 글씨를 쓴 후 낙관 자리에 약지가 잘려있는 왼손 손바닥 도장인 장인(掌印)을 찍고 “大韓國人 安重根 書”라고 썼습니다. 기증 관련 서신 기증자 가족의 감사 편지 안중근 유묵은 안중근의사의 독립에 대한 결연한 의지와 동양평화에 대한 염원이 담긴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
2022.10.06 0 2427
2025년 04월 : 화관(花冠) H
화관(花冠)은 꽃·보석 등을 장식하여 아름답게 만든 쓰개로, 조선시대 왕실 여인들이 예복과 함께 착용하던 의례용 관모 중 하나입니다. 혹은 궁중 잔치에서 정재여령(呈才女伶)이 춤을 출 때 착용했던 관모입니다. 화관은 ‘꽃 화(花)’와 ‘갓 관(冠)’이라는 이름처럼, 머리에 꽃을 꽂아 장식했던 삽화(揷花)의 풍습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꽃으로 장식한 화관은 고대 중국과 동유럽에서도 유행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점차 금방 시드는 생화를 대신해서 종이나 비단 등으로 만든 조화(造花)가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나라 화관의 기원에 대한 근거는 많지 않으나 송대(宋代)의 화관이나 삽화의 유행이 고려시대에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화관(花冠) 조선시대 여성의 화관은 주로 경사나 혼례 시에 예복과 함께 착용되었습니다. 이는 조선 영·정조대에 가체 대용으로 족두리와 함께 화관을 사용하게 함으로써 확산되었습니다. 『병와집甁窩集』에서 화관은 혼인한 여성[昏女]의 머리장식[頭飾]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조선 말기의 왕실(王室)에서는 주로 소례복인 당의(唐衣)에 착용하였고 민간에서는 혼례시 착용토록 허용되었습니다. 기본형태는 유사하나 장식품의 재질과 장식에 차이가 있습니다. 머리에는 화관을 쓰고 대란치마와 당의를 착용한 모습의 덕혜옹주 (출처 : 황족화보皇族畵報》 제220호, 국립고궁박물관) 화관은 꽃 모양으로 장식하거나 각종 보석을 올려서 화려하게 장식하여 만듭니다. 예복용 화관은 양옆이 개방된 구조로 대부분 여러 겹의 종이를 배접하여 만든 사각이나 육각, 혹은 팔각의 기본 틀을 검은색, 홍색 등의 비단으로 감싸고 그 위에 옥판, 석웅황, 밀화, 비취, 진주 등의 각종 보석을 올려 장식하였습니다. 특히 앞 중심에는 금전지로 싼 술 장식을 늘어뜨리거나 진주로 된 드림을 달아 장식하기도 합니다. 상판에는 옥, 석웅황, 유리구슬 등과 함께 떨철을 달아 움직임에 따라 아름답게 보일 수 있도록 장식했습니다. 평양 지방의 신부 혼례복에서는 색색의 조화를 꽂아서 장식한 화려한 모양의 화관을 사용하였습니다. 머리 위로 높게 솟은 구조와 좌우로 퍼진 형태는 권위와 존엄, 길상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장식 요소 하나하나에는 부귀·다산·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원삼과 화관을 착용한 신부 - 엘리자베스 키스(Elizabeth Keith, 1887~1956) 전시 포스터 (출처:국립민속박물관) 이러한 예장용으로써의 화관 뿐 아니라 조선 말기까지 궁중정재(宮中呈才)할 때 여령(女伶)·동기(童妓)·무동(舞童)의 머리 장식품으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조선시대 『세종실록世宗實錄』에서 남악(男樂) 정재(呈才) 관복 중에 부용관(芙蓉冠)의 기록이 있고, 『악학궤범樂學軌範』 무동관복도설에도 부용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부용관의 ‘부용(芙蓉)’은 연꽃을 의미하는 한자로 따라서 부용관은 화관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화려한 장식의 예복용 화관과 달리 궁중정재에서 동기(童伎)용 화관은 비슷한 구조를 가지나 화려한 보석 장식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부용관(본 박물관 소장품) 오늘날 화관은 한국 전통의상 속의 미적 절정을 보여주는 유물로, 그 속에 담긴 기술, 상징, 예법은 한국 전통문화의 깊이를 말해줍니다. 고운 꽃이 머리에 피어난 듯한 화관은, 단순한 장신구를 넘어 여성의 품위와 경사스러운 순간을 기리는 문화적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왕실의 예복과 장신구』, 국립고궁박물관, 2015 『한국의식주생활사전(의생활)』, 국립민속박물관, 2017 국악사전, 국립국악원, https://www.gugak.go.kr/ency/topic/view/552
2025.04.02 0 580
2023년 12월 : 경주 대릉원, 인왕동 156-1・2호분 출토 신라유물 H
● 단국대학교 박물관 고적조사단, 신라 고분(古墳) 정화사업 참여 경주 인왕동 156-1・2호분은 1971년부터 진행된 ‘경주종합개발계획사업’의 일환으로 “신라 고분 정화사업”이 진행되면서 단국대학교 박물관 조사단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습니다. 고분 발굴조사는 1973년 7월 15일부터 8월 17일까지 정영호 교수(당시 박물관장)를 단장으로 이호영 교수(당시 박물관 연구원)와 박영복 전 국립경주박물관장(당시 대학원생)을 비롯한 사학과 학생 34명이 참여하였습니다. 장충식 명예이사장님(당시 단국대학교 총장, 사진 중앙)은 조사현장을 찾아 삼복더위에 조사에 참여한 발굴조사단을 격려하였습니다(1973년). 단국대학교 조사단은 경주 미추왕릉 북쪽의 황남동 109호분에 대한 발굴조사를 진행하였으나, 1934년 조선고적연구회에 의해 조사된 유적으로 확인되어, 인왕동의 추정 고분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습니다. 고분 발굴조사 모습 ● 새로운 신라 왕릉급 고분을 발견하다. ○ 인왕동 156-1호분 7월 15일 시작된 156-1호분 발굴조사는 봉분을 이루는 적석(積石)을 제거하는 일에만 15일이 소요되었습니다. 그러나 7월 3 일 조사단의 기대와는 다르게 남벽에서 도굴(盜掘) 흔적이 확인되었습니다. 고분은 적석목곽묘의 형태로 은제 과대(銙帶)를 비롯하여 토기편과 유리구슬 등 22건 230점의 유물이 수습되었습니다. 인왕동 156-1호분 출토 은제 과대 ○ 156-2호분 2호분은 156-1호분을 발굴하던 중 북쪽 지하 30cm에서 적석의 일부가 노출되어 조사확인된 적석총입니다. 7월 20일부터 8월 17일까지 진행된 발굴조사를 통해서 묘는 적석목곽묘임이 확인되었습니다. 부장품으로 굵은고리 금귀걸이 1쌍, 목걸이, 은제 과대, 둥근고리 큰칼(환두대도)편, 토기 등 167건 781점에 이르는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고분은 출토유물의 편년으로 보아 5세기 후반에 조성된 신라 최상위 계층의 무덤으로 밝혀졌습니다. 인왕동 156-2호분 출토 여러잔토기(母子高杯) 인왕동 156-2호분 출토 철기류 인왕동 156-2호분 출토 토기류 ● 인왕동 156-1・2호분 발굴 50주년, 다시 태어나다. 2023년은 경주 인왕동 156-1・2호분이 세상에 알려진 지 5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당시 발굴조사에 참여하였던 단국인들의 노력과 땀이 문화재청과 (사)대학박물관협회가 주관하는 ‘매장문화재 미정리유물 보존 및 활용사업’의 일환으로 발굴 50년 만에 다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인왕동 156-2호분 출토 장신구(금귀걸이, 곡옥, 목걸이 등)
2023.11.30 0 906
2022년 9월 : 색동두루마기 H
색동두루마기, 1947년 색동두루마기는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온공주(1822~1844)의 손녀인 윤백영(1888~1986)여사가 손자의 돌을 맞아 손수 지은 어린이용 두루마기입니다. 어른의 두루마기와 형태는 같지만 소매부분을 오방색 등의 다채로운 옷감을 이용하여 색동으로 만든 것이 특징입니다. 알록달록 때깔을 입혔다고 해 ‘때때옷’이라고도 하고, 섣달 그믐날인 ‘까치설날’에 입기 시작한다고 해 ‘까치두루마기’, 소매와 몸판을 오방색 등으로 배색해서 ‘오방장두루마기’라고도 불렸습니다. 까치두루마기,1937년 호건, 1950년 호건은 주로 상류층 남자아이가 복건 대신에 사용한 모자로 명절에 주로 착용하였습니다. 잡귀를 쫓기 위해, 좌우에 귀를 달고 눈썹, 눈, 코, 입, 수염 등을 수놓아 호랑이의 용맹스런 형상을 나타내주었습니다. 양쪽의 끈과 모자의 가장자리는 아이가 훌륭한 인품을 지니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염원을 담은 덕담을 금박으로 장식하기도 하였습니다. 색동두루마기와 전복을 입고, 복건을 쓴 모습 오방색 주머니, 1890년 오방색 주머니는 덕온공주 집안에서 전해진 유물입니다. 청색과 적색, 백색, 흑색의 비단을 각각 동서남북 방위에 맞춰 배열하고, 중앙을 의미하는 황색을 장식하여 나쁜 기운을 막고자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통 아이옷에는 부모와 어른들의 염려와 기대를 담아 전하는 ‘마음을 담아 지은 사랑’이 고스란히 나타나 있습니다.
2022.09.06 0 2224
2022년 11월 : 석호상(石虎像) H
1986년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한남동캠퍼스)앞 석호상 모습 호랑이는 일찍부터 동양의 음양오행사상에서 서쪽을 수호하는 방위신으로 중요하게 인식하였으며, 무덤을 보호하는 12지신의 하나로 봉분 호석(護石)에 새기거나 별도로 조각하여 배치하였다. 우리나라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1330~1374)과 노국공주의 현‧정릉(玄‧正陵)에 이르러 석호가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석호는 왕릉의 상계(上階, 또는 초계)에 해당하는 봉분 좌우에 놓이는데, 석양(石羊), 석마(石馬)와 함께 한 쌍 혹은 두 쌍이 배치되어 석수(石獸)로서 왕릉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조선시대 석호상의 조각의 문헌 규정과 배치를 규정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1474년) 「흉례(凶禮)」 치장(治葬) 조에는 “석호(石虎), 4개를 설치하되 북에 2개, 동‧서에 각각 1개를 설치하는데, 모두 밖을 향하게 한다.”고 하였다.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죽전캠퍼스)앞을 지키고 있는 석호상 석주선기념박물관 석호는 조선 제11대 중종(中宗, 1488~1544)의 계비였던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 1491~1515)의 초장지인 옛 희릉(禧陵)에 배치되었던 의물(儀物)로 전해진다. 희릉은 1515년(중종 10)에 장경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태종의 헌릉(獻陵) 서쪽 언덕에 능을 조성한 능이었으나, 1537년(중종 32)에 경기도 고양시로 천장(遷葬)하게 되면서 무덤의 의물이었던 석호상이 묻히게(埋安)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좌·우측 석호상의 얼굴 1970년대에 도굴되었으나 다행히 회수되었으며, 2014년 보존처리가 실시되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최를 기념하는 국립중앙박물관 “동아시아의 호랑이 미술” 특별전에 한국 석호상의 우수성을 알리는 대표 유물로서 출품되었다. 좌측 석호상 정면, 우측 석호상 후측면 전체적으로 유려한 곡선으로 표현하면서도 입체감 있게 조각하여 정중동(靜中動)의 느낌이 강한데, 다소 해학적인 얼굴 묘사에도 불구하고 결코 가볍지 않은 위엄을 보여주고 있는 조선 전반기의 대표적인 호랑이 조각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2022.11.01 0 1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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