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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5월 : 활옷(전통 여성 혼례복)

202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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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6월 6일, 창덕궁에 있던 구 왕실재산관리처에 발생한 의문의 화재로 안타깝게도 그곳에 소장되어 있던 활옷이 거의 불타고 활옷의 앞길 조각만 남게 되었습니다. 故 석주선박사는 화재가 발생하기 1년 전인 1959년 6월부터 약 5개월에 걸쳐 지도하던 제자들과 창덕궁에 소장된 활옷의 복제품을 제작하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활옷 복제품 앞길의 안쪽에는 작업에 참여한 이들의 이름과 뒷길 안쪽에는 ‘1955 石宙善古典衣裳硏究所藏’를 자수해 이 활옷이 복제품임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화재 수습 후 故 석주선 박사는 활옷을 복제했던 인연으로 창덕궁 관계자로부터 불타고 남은 활옷 조각을 양도받았다고 전해집니다. 불에 타버린 조각은 원래의 형태와 색상을 잃어버렸지만, 역사의 흔적으로 간직되어있습니다. 창덕궁 화재 시 타고 남은 활옷 조각 1960년 6월7일 구황실재산관리총국의 화재 사건을 전하는 ‘동아일보’ 기사. (출처:https://weekly.donga.com/List/3/all/11/80459/1) 1959년 故 석주선선생이 제자들과 함께 제작한 창덕궁의 활옷 복제품(앞) 1959년 故 석주선선생이 제자들과 함께 제작한 창덕궁의 활옷 복제품(뒤) 활옷은 조선시대 여성들이 입었던 예복의 한 종류로 왕실 여성의 혼례복인 홍장삼(紅長衫)과 같은 옷으로 추정됩니다. 19세기 말부터는 사대부가와 평민 여인들 모두 입는 예복이 되었습니다. 활옷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화의(花衣, 華衣)에서 기원한 것으로 크다는 뜻의 ‘하’와 ‘옷’이 합쳐져 ‘하옷’–‘할옷’–‘활옷’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중요한 예식에 입는 큰 옷을 의미합니다. 활옷의 가장 큰 특징은 의복 전체가 화려한 자수로 장식되었다는 점입니다. 앞 길이가 뒤보다 짧고 소매는 색동과 흰색의 한삼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또한 활옷의 색상은 각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옷 전체의 색상인 홍색은 벽사와 길상을 의미하며 동양에서는 전통적으로 신부복의 색상으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겉감의 홍색과 안의 청색은 음양의 조화를 뜻하며 소매의 색동은 화려함과 행운을, 그리고 백색의 한삼은 정숙함을 뜻합니다. 활옷의 앞길 아래에는 파도와 괴석을 배치하고 좌우에 봉황이 마주 보도록 수놓았습니다. 뒷길과 한삼에는 모란, 연꽃, 나비, 백로 등이 다채로운 색상으로 수놓아 장식되어 있습니다. 이 문양들은 남녀의 사랑과 인연, 부귀와 다산 등을 상징하는데 결혼하는 두 남녀의 행복한 결혼생활에 대한 염원을 담고 있습니다. 앞길의 봉황과 모란, 뒷길의 연꽃과 백로, 나비와 모란 등 활옷의 다양한 문양 우리나라의 풍습 중 섭성(攝盛)은 중요한 행사에 신분이나 품계에 관계 없이 최고의 옷을 입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에 따라 민가에서도 활옷과 같은 궁중 예복을 입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자수로 복식 전체를 장식하는 활옷은 개인이 쉽게 만들기 어려웠기 때문에 대여해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대의(貸衣) 풍습은 조선 후기에는 관청에서 관리하다 19세기 이후에는 개인사업자가 등장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점을 세물전(貰物廛)이라고 합니다. 세물전을 통해 예식에 필요한 옷과 치장구를 구할 수 있었기에 당시의 왕족이나 평민의 혼례식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활옷은 모든 계층의 여인들이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아름다운 혼례를 치를 수 있었던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복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물전 신문 광고(출처 : 매잀니보, 1933.9.25), 덕흥사세물전 전경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재인용) 혼례날 신부의 머리나 화장이 닿아 생기는 오염을 방지하기위해 목선 뒷부분에는 한지로 만든 복숭아 모양의 바대를 덧대고 한삼에도 한지를 덧대었다. 1990년대 초반 반가에서 착용했던 활옷으로 문양이 다소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다. 현대에는 활옷을 결혼식 후 신랑 신부가 전통 혼례복을 입고 치르는 폐백에서 신부들이 입습니다. 새로운 가족들과 인사를 나누는 폐백은 신랑 신부가 자식을 많이 낳아 행복한 가족을 이루고 오랫동안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축복하는 의식입니다. 이러한 행사에 신부의 앞날에 대한 축복의 염원을 가득히 담고 있는 활옷은 신부가 입기에 더없이 적합한 옷입니다. 참고문헌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2009, 『박물관 신축 개관 전시 도록』 석주선(1975), 『衣』,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민속박물관. 권혜진(2009), 『활옷의 역사와 조형성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인터넷 동아일보:https://weekly.donga.com 한국문화재재단(2021), 「혼인-의복에 담긴 사랑, 전통 혼례복 활옷」, 『월간문화재 가을호-사랑과 전쟁』.

2023년 4월 : 기와 장인(匠人)의 자화상(自畵像) 얼굴무늬 기와

202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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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무늬 기와는 평기와(암키와)의 배면(背面)에 사람의 얼굴을 음각(陰刻)한 기와편입니다. 내면에는 포목흔(布木痕), 측면에는 안쪽에서 그은 분할흔(分割痕)이 확인되어 제작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얼굴무늬 기와 기와에 예리한 도구를 이용하여 새겨진 얼굴은 눈웃음을 짓고 있으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간 웃는 모습으로 과하지 않은 매우 선하고 친근한 모습입니다. 얼굴무늬 기와(내면) 현재 모습으로 보아 기와를 기와 성형틀(瓦桶)에서 떼어낸 다음 가마에서 소성하기 전에 기와 표면을 물손질하여 문양을 지우고 얼굴을 새긴 것으로 보입니다다. 얼굴무늬기와 제작 순서 기와 성형-성형틀 제거-분할-건조-물손질-얼굴 새김-가마 소성 얼굴무늬 기와 세부 얼굴을 새기기 전에 물손질하였는데, 제작과정에서 타날판으로 두르려 새겨진 무늬가 희미하게 확인됩니다. 기와 장인의 자화상(自畵像)? 이 기와는 당시 기와를 만들었던 장인(匠人)의 단순한 장난으로 새긴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고려시대 불사(佛寺) 공역(工役)에 참여한 와장(瓦匠)의 심리와 종교적 신념을 추측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완전한 국가 종교가 되었습니다. 고려는 국가이념이나 국가 정책의 기본 방침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근간으로 하는 국시(國是)를 채택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고려는 불교국가로서 왕실과 귀족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불교를 믿고 숭상하였습니다. 이러한 사회풍토에서 사찰 공역에 참여한 기와 장인은 불교의 극락왕생을 이룰 수 있다는 종교적 믿음에서 이와 같은 얼굴을 새기진 않았을까? 더욱 부처님 계신 법당의 지붕이라는 상징성에서 불국토에서 부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부처님과 함께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본 것은 아닐까?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 신라시대 국립경주박물관 소장(보물 제2010호) 얼굴무늬 수키와 양양 진전사터, 고려시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A1719) 얼굴무늬(女) 마룻기와(망새) 포항 해봉사, 조선시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A1046) 얼굴무늬(男) 마룻기와(망새) 포항 해봉사, 조선시대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A1047) 영월 흥교사 기와가 출토된 흥교사터(興敎寺址)는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흥월리의 태화산(太華山) 남록에 위치하는데, 김부식(金富軾, 1075 ~ 1151)이 쓴 [삼국사기(三國史記)] 비롯한 역사서에 따르면, 후고구려[태봉]를 건국한 궁예(弓裔, ? ~ 918.6)가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스스로를 선종(善宗)이라 한 곳인 세달사(世達寺)가 바로 흥교사입니다. 일연(一然, 1206~1289)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세규사(世逵寺)라 하였는데, 이는 세달사의 잘못된 표기[誤記]이며, 이보다 앞서 균여(均如, 923~973)의 [십구장원통기(十句章圓通記)]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1055 ~ 1101)의 기록을 통해서도 세달사와 흥교사가 같은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지도(동여비고)에 보이는 태화산 흥교사 (출처: 문화재청, 2004, [蒼嶺寺]) 1967년 4월 4일 단국대학교 박물관 정영호(鄭永鎬, 1934.11.3.~2017.4.7) 관장을 비롯하여 진홍섭(秦弘燮, 1918.3.8 ~ 2010.11.6.) 교수와 최순우(崔淳雨, 1916 ~ 1984) 선생은 신라오악종합학술조사(新羅五嶽綜合學術調査)의 태백산지구(太白山地區) 제5차 조사에서 폐허가 된 흥교사터를 처음 조사하였습니다. 이때, 법당(法堂)터, 계단석, 석축, 비전(碑殿)터 등의 유구(遺構)를 비롯하여 석탑재, 사각형 전돌[方形塼], 와당(瓦當) 등의 유물(遺物)을 확인하였습니다. 최근 여러 차례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시대 후기에 창건되어 조선시대까지 법맥(法脈)이 이어진 사찰임이 밝혀졌습니다. 참고문헌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2009, 『박물관 신축 개관 전시 도록』 考古美術同人會, 1967.4, 「新羅五岳太白山地區調査」, 『考古美術』 通卷 第81 문화재청, 2004, 『蒼嶺寺』 영월군‧중부고고연구소, 2015, 『寧越 興敎寺址Ⅲ』 鄭永鎬, 1969.12,「新羅 獅子山 興寧寺址 硏究」, 『白山學報』7號, 白山學會.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주 얼굴무늬 수막새 사진은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국립경주박물관 소장품 “人面文圓瓦當”을 이용하였음

2023년 3월 : 국가민속문화재 제2호 심동신(沈東臣)의 금관

2023.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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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유물은 조선 말기 문신인 심동신(沈東臣, 1824~ ?)이 착용했던 금관(金冠)으로 1964년 국가민속문화재 제2호로 지정되어 어느덧 지정 60주년이 되었습니다. 심동신(沈東臣)의 금관 심동신은 순조 24년(1824)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사경(士敬)입니다. 철종 원년(1850) 증광시(增廣試) 을과(乙科)에 급제하였으며 황해도 관찰사, 의금부사, 사헌부대사헌 등을 지냈습니다. 이 유물은 심동신이 참판으로 있을 때 착용했던 것으로 후손들에 의해 보관되어 오다가 1948년 7대손인 최우씨로부터 조복(朝服)과 함께 故 석주선박사에게 전해진 후 우리 박물관에 기증되었습니다. 이하응 초상-금관조복본 (보물 제1499호, 출처:문화재청) 금관(金冠)은 문무백관이 조복(朝服)이나 제복(祭服) 차림을 할 때 함께 착용했던 관모로 금량관(金粱冠) 또는 양관(梁冠)이라고도 합니다. 조복은 조선시대 관료들이 나라에 큰 행사나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지낼 때나 설날[元旦]과 동지(冬至) 등에 착용한 예복입니다. 금관과 함께 착용하므로 ‘금관조복(金冠朝服)’이라고도 합니다. 심동신의 조복(국가민속문화재 제2호) 심동신이 조복과 함께 들었던 홀(笏) 조선시대 금관은 계급에 따라 관 상부의 금색선인 양(梁)의 수량이 구분되었습니다. 1416년(태종 16)에 문무백관의 조복제도를 정한 이후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양관은 조복과 제복에 공통으로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1품은 5량관, 2품은 4량관, 3품은 3량관, 4·5·6품은 2량관, 7·8·9품은 1량관을 썼고, 왕세자는 강사포에 6량관을 쓰도록 정하였습니다. 이것은 명(明)에 대한 이등체강(二等遞降)의 원칙을 따른 것이었으나, 대한제국 시기 대한예전(大韓禮典)에는 칠양관제를 명과 동일하게 적용하도록 했습니다. 금관은 관 전면의 머리둘레 부분인 관무(冠武, 관의 앞쪽 이마에 닿는 부분)와 다음 두 개의 산봉우리 모양인 뒷면 장식판, 마지막으로 관 앞의 중심에서 정수리를 덮어 뒷면 장식판에 연결된 굽은 양주(梁柱)로 구성됩니다. 여기에 관의 뒷부분을 관통하는 나무비녀(木簪)와 관을 머리에 고정시키는 영(纓)이 함께 구성되어있습니다. 뒷부분 양옆에는 관무의 양 끝을 끼울 수 있는 고리가 달려있어 크기를 조정하고 고정할 수 있게 되어있습니다. 금관의 구조 심동신의 양관은 종선이 5개인 오량관(五梁冠)으로 높이는 19.7㎝이며 목잠(木簪)과 옥색의 술달린 끈[纓]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관무와 배면은 문양을 투조하여 새긴 후 금칠하고 양주는 죽사(竹絲)로 모양을 잡고 흑색 비단을 씌워 만들었습니다. 이때 사용된 흑색 비단은 신축이 우수한 추사(縐紗)가 사용되었습니다. 현전하는 유물은 5량관이 대부분이며, 정인학(鄭仁學, 1839~1919)의 육량관이 우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정인학(鄭仁學, 1839~1919)의 육량관

2023년 2월 : 평삼홉(平三合), 고오홉(高五合) 명문 홉

2023.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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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이, 부피, 무게를 재는 기구 또는 단위를 총칭해서 도량형(度量衡)이라고 합니다. 길이를 재는 자는 도(度), 부피를 재는 되와 말, 홉은 량(量), 무게를 재는 저울과 저울추는 형(衡)에 해당합니다. 이들 도량형기들은 오랜 기간 인류와 함께 해 온 삶의 동반자였습니다. 일찍이 조선시대 실학자인 유형원은 󰡔반계수록(磻溪隧錄)󰡕에서 “도량형은 누구나 항상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장단(長短)이 있어서는 안되며 일정하게 된 후에는 거짓됨이 끼어들지 못하여 천하(天下)가 균평(均平)하여 진다”고 하였습니다. 통일된 도량형의 기준 제시와 유지는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안정과 질서를 가져다 준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이달의 유물인 ‘명문 홉’은 작은 분량의 부피를 잴 때 사용했던 용기입니다. 통나무의 속을 파서 손잡이까지 일체형으로 만든 홉으로 한쪽에는 길쭉한 원통형 손잡이가 달려 있습니다. 전체적인 크기는 18×7×5.5cm이며 손잡이에는 지름 1.5cm의 구멍이 있습니다. 재미있게도 한 면에는 ‘高五合’ 다른 한 면에는 ‘平三合’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고봉으로 할 때는 5홉, 평목(平木)으로 평평하게 깎으면 3홉이라는 의미입니다. 평목(平木)으로 평평하게 깎은 모습 ‘평삽홉(平三合)’ 명문 고봉으로 올린 모습 ‘고오홉(高五合)’ 명문 홉은 한 줌의 양으로, ‘합한다’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홉은 되의 10분의 1을 나타내는 단위로 10작(勺)이며 약 180ml 정도입니다. 주로 조, 깨 등 조그마한 곡물을 재는 데 사용했습니다. 10홉이면 1되[升], 10되면 1말[斗], 10말이면 1곡(斛)입니다. 반홉(5작)과 1홉 다양한 형태의 되 명문 되(盖井洞 李監察宅) 원통형 말 우리 박물관에는 약 800여 점에 달하는 많은 도량형기들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해마다 전국을 조사하고 발굴하면서 시골 농가에서 수집한 것들로 우리 박물관의 꾸준한 유물 수집의 노력이 담겨져 있습니다. 박물관 소장 다양한 도량형기들

2023년 1월 : 윷판과 윷말주머니

2023.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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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새해 설날을 맞아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이 소개할 이달의 유물은 윷판과 윷말주머니입니다. 설날은 설빔을 입고 차례를 지내 조상에게 인사를 하고 주변 어른들에게 세배하며 새해의 행운과 행복을 기원하는 날입니다. 설날에 모인 가족이나 이웃들은 세시 민속놀이를 즐겼는데 윷놀이가 그중 하나입니다. 정조대왕과 화빈윤씨가 사용한 윷판과 윷말주머니 이 유물은 정조(正祖, 1752~1800) 임금과 후궁 화빈윤씨(和嬪尹氏 :1765~1824)가 사용했던 윷판과 윷말주머니입니다. 화빈윤씨는 1780년(정조 4)에 정조의 두 번째 후궁으로 간택된 인물입니다. 덕온공주의 후손인 윤백영여사가 1963년에 이러한 유물의 내력에 대해 쓴 묵서가 윷판의 뒷면에 부착되어있습니다. 윷판 뒷면에 부락된 윤백영여사의 한글 메모 윷판은 두꺼운 사각형의 한지에 기름을 먹이고 그 위에 채색한 팔보문양지를 붙여 29개의 점을 표시했습니다. 윷판은 종이로 만들었지만 가죽과 유사한 질감에 견고하고 평활한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윷말을 보관하던 윷말주머니는 왕실의 유물답게 금사(金絲)를 넣어 짠 화려한 금선단으로 만들었습니다. 윷말주머니 직물 네모난 주머니를 만들어 입구를 세 가닥으로 모아 매듭끈을 꿴 귀주머니입니다. 윷말주머니는 처음부터 윷판에 매달려있던 것이 아니라 1974년에 기증된 후 보관과 관리를 위해 부착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윷판은 함께 있던 가죽끈을 한쪽 모서리 중앙에 있는 절개 부분에 끼워 말아 보관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안타깝게도 사용했던 윷은 전해지지 않고 있습니다. 윤백영여사가 유물의 내력에 관해 적은 묵서 윷놀이는 설날인 정월 초하루에서 보름까지 즐기던 민속놀이입니다. 29개의 점으로 구성된 윷판(또는 말판) 위에서 네 개의 윷가락을 던지고 그 결과에 따라 네 개의 말을 움직여 모든 말이 윷판을 모두 빠져나오면 승리하는 놀이입니다. 윷의 한자어인 사(柶)는 네 개의 나무각대기를 가지고 논다는 뜻으로 간단한 놀이방법으로 남녀노소 누구나 즐길 수 있습니다. 윷(19세기,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윷’은 삼국시대와 고려시대 문헌에서는 중국의 전통놀이인 ‘저포(樗蒲)’와 동일한 것으로 보기도 하고 혼용하여 지칭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사희(柶戲)’라는 용어가 나타났고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윷놀이는 우리 민족의 우주관과 천문관을 바탕으로 음(陰)과 양(陽), 천체의 28수(宿) 등 형식의 완결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놀이의 방식이 단순해서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놀이입니다. 기산 김준근(箕山 金俊根)의 풍속화 중 윷놀이(출처 : 국립민속박물관) 전통 놀이 '윷놀이'는 지난해 2022년 11월 11일, 그 가치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2022년 12월 : 자적당의

202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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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서 소개해드리는 12월 이달의 유물은 조선의 마지막 공주 덕온공주의 “자적당의”입니다. 국가민속문화재 1호 덕온공주 당의 덕온공주는 누구? 덕온공주(1822~1844)는 조선 23대 왕 순조(純祖)와 순조비 순원왕후(1789~1857) 사이에서 1822년(순조 22) 6월 10일에 출생하였으며 하가(下嫁) 한 지 7년 되던 헌종 10년(1844)에 23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덕온공주는 왕과 왕비의 혈통을 이어받은 조선시대 마지막 공주로서 2012년에는 우리 박물관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덕온공주와 그 후손의 유물들로 특별전을 열기도 하였습니다.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전시장 전경 덕온가 유물과 석주선기념박물관의 만남 현재 우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덕온공주와 관련된 유물은 총 222점입니다. 이 가운데 국가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해 보호 대상으로 지정한 국가민속문화재 40점(제1호 1점, 제211호 6점, 제212호 33점)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고(故) 난사(蘭斯) 석주선(石宙善: 1911~1996) 박사의 수집품 가운데 최고라 할 수 있는 덕온공주와 그 후손들의 유물들은 1950년대 후반 장서각(藏書閣)에서 덕온공주의 손녀인 윤백영 (尹伯榮: 1888~1986) 여사와 첫 만남을 시작하면서 이어온 오랜 인연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우리의 전통을 지키기 위하여 일생을 바치신 복식학자들의 노력이 우리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서 결실을 맺게 된 것입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1호 지정 당의는 여성들이 입는 예복 중의 하나로 저고리 위에 덧입는 옷입니다. 이 자적색의 당의는 덕온공주가 당시에는 늦은 나이인 16세에 윤의선(尹宜善:1823~1887)과 혼례를 하고 첫 동지(冬至) 명절 1837년에 입었던 옷이었습니다. 이 옷의 특징을 자세히 살펴보면 옷 품, 진동(어깨에서 겨드랑이), 소매통이 좁아지면서 옆선 아래의 곡선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또한 동정이 좁고 고름이 길어지는 등 형태적으로 조선 후기 당의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중요한 가치를 인정받아 1964년 국가민속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좌측 17세기 당의(해평윤씨묘 출토), 우측 19세기 이후 당의(덕온공주일가) 우리 조상들의 기원과 의미가 담긴 “자적당의” 동지에 먹는 팥죽의 붉은색은 잡귀와 액운을 몰아내고, 전염병을 예방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당의의 자적색도 같은 의미로 팥죽과 같은 색상으로 지어 입었습니다. 겉감은 복숭아, 석류, 불수를 조합한 자적 도류불수단(桃榴佛手緞)으로 그 문양의 의미는 장수(복숭아), 다산과 다남(석류), 복(불수)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수(壽)와 복(福) 문자를 직금(織金), 즉 금실로 짜여져 그 의미가 배가 된 특별한 옷감입니다. 안감은 분홍색, 진홍색 명주를 다듬이하여 마치 얇은 종이처럼 매끈하게 처리되어 있습니다. 도류불수단 위에 금실로 짠 수(壽)와 복(福) 특히 이 당의는 덕온공주의 아들(양자) 윤용구(尹用求: 1853~1939)가 딸 윤백영에게 물려 준 옷으로, 후대에 손녀 윤백영 여사는 7살 되던 해 부친과 함께 고종 황제를 알현하기 위하여 입궐하였을 때 이 옷이 커서 줄여 입었다고 회고하였습니다.

2022년 11월 : 석호상(石虎像)

2022.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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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한남동캠퍼스)앞 석호상 모습 호랑이는 일찍부터 동양의 음양오행사상에서 서쪽을 수호하는 방위신으로 중요하게 인식하였으며, 무덤을 보호하는 12지신의 하나로 봉분 호석(護石)에 새기거나 별도로 조각하여 배치하였다. 우리나라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1330~1374)과 노국공주의 현‧정릉(玄‧正陵)에 이르러 석호가 설치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석호는 왕릉의 상계(上階, 또는 초계)에 해당하는 봉분 좌우에 놓이는데, 석양(石羊), 석마(石馬)와 함께 한 쌍 혹은 두 쌍이 배치되어 석수(石獸)로서 왕릉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조선시대 석호상의 조각의 문헌 규정과 배치를 규정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1474년) 「흉례(凶禮)」 치장(治葬) 조에는 “석호(石虎), 4개를 설치하되 북에 2개, 동‧서에 각각 1개를 설치하는데, 모두 밖을 향하게 한다.”고 하였다.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죽전캠퍼스)앞을 지키고 있는 석호상 석주선기념박물관 석호는 조선 제11대 중종(中宗, 1488~1544)의 계비였던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 尹氏, 1491~1515)의 초장지인 옛 희릉(禧陵)에 배치되었던 의물(儀物)로 전해진다. 희릉은 1515년(중종 10)에 장경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는 태종의 헌릉(獻陵) 서쪽 언덕에 능을 조성한 능이었으나, 1537년(중종 32)에 경기도 고양시로 천장(遷葬)하게 되면서 무덤의 의물이었던 석호상이 묻히게(埋安)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좌·우측 석호상의 얼굴 1970년대에 도굴되었으나 다행히 회수되었으며, 2014년 보존처리가 실시되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최를 기념하는 국립중앙박물관 “동아시아의 호랑이 미술” 특별전에 한국 석호상의 우수성을 알리는 대표 유물로서 출품되었다. 좌측 석호상 정면, 우측 석호상 후측면 전체적으로 유려한 곡선으로 표현하면서도 입체감 있게 조각하여 정중동(靜中動)의 느낌이 강한데, 다소 해학적인 얼굴 묘사에도 불구하고 결코 가볍지 않은 위엄을 보여주고 있는 조선 전반기의 대표적인 호랑이 조각상으로 평가되고 있다.